「양평시민의소리」에서 작가 김용만의 장편소설 『미친 사랑』을 4월 9일부터 인끼리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친 사랑』은 지난 1994년 『인간의 시간』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던 장편소설을 전면 개작한 작품으로 3인칭 소설이 1인칭 소설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해와 관용까지를 포함한 운명의 뜻이란…

 

 

흔들리는 몸

 

 

스텝을 밟던 미나의 발이 머뭇거렸다. 차명구의 스텝도 흔들렸다. 미나는 어젯밤 오빠의 말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참에 아주 끝내도록 해라. 글러먹은 싹수는 일찍 베어버리는 게 수야. 용해 그 인간은 벌써 글러먹은 싹수다. 나한테 말대꾸하던 싸가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출세를 바라지 않는다고? 경찰이 천직이라고? 미친놈. 그런 말은 모두 널 떼려는 수작야. 너도 늦기 전에 그놈을 깨끗이 잊어. 차 부장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그놈과는 비교가 안 된다. 너를 진작 차 부장과 맺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럽구나.

밴드 연주가 끝나자 미나는 앞장서 술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숨소리는 열기를 뿜어냈다. 마음껏 흔들어본 춤이었다. 춤이라기보다 숫제 몸부림이었다. 술자리와 춤자리는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탱고는 어려운 춤인데, 이젠 제가 못 따라갈 정돈데요.”

차명구가 맥주잔을 채우며 미나를 추켜주었다. 무수한 담홍색 빛방울들이 홀 안에 술렁거렸다. 그것들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단풍잎 같기도 했다.

미나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액채의 싸늘한 감촉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차명구의 모습은 가지고 놀기에 좋은 노리개였다.

정말로 제 춤솜씨가 늘었어요?”

늘다마다요. 우리의 만남이 일곱 번짼데 만날 때마다 솜씨가 달라요.”

일곱 번째요? 참 정확하시네요. 저는 첫 번짼지 열 번짼지 도통 헷갈리는데요. 그렇게 정확하시니까 오빠가 차 부장님을 아끼시나 봐요.”

어느새 미나의 목소리가 풀어졌다.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미나는 빈 잔을 내밀었다. 손까지 덧싸며 술을 따르는 차명구의 뜨거운 감촉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오늘 밤 아주 줘버릴까? 하지만 아직은 안 돼. 마음이 내키지 않거든.

골똘히 생각하시는 분위기가 아주 멋있어요.”

차 부장님도 분위기를 좋아하세요?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 같은데.... 차 부장님은 저보다 일곱 살 위시죠?”

저는 미스 박과 동갑내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미스 박이 뭐예요. 저는 엄연히 유부녀고 애엄마예요.”

미스라고 부르는 건 제 자유죠.”

후후훗.”

제 말이 우습나요?”

아녜요, 다른 생각 땜에 그래요. 어느 미친 사람이 자신을 야, , , 개새끼로 불러달라고 했거든요. 그게 마음 편하다나요. 그러니 차 부장님도 저를 야, , , 미친년으로 불러주세요. 그러면 키스해 드릴게요.”

미나가 어리광스럽게 말했다. 차명구가 정말 키스해 줄 거냐고 묻자 그럼요.”라고 재차 확인해 주었다. 차명구는 , , .” 하며 미나 앞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미나가 그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짝 대주었다. 그러자 차명구는 미나의 허리를 팔로 감아당기며 얼굴을 밀착시켰다. 무대에서는 촉촉한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차명구는 미나의 허리에서 팔을 거두고도 손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접근해 보는 시도였다. 그만큼 자신감이 들었다. 박상진 회장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네는 우리 미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느닷없는 말이었다. 그날 밤 박 회장네 응접실에는 미나의 올케도 동석했는데 그녀가 남편의 마음을 대신 드러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회장님은 차 부장님을 내 식구로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그만큼 차 부장님을 신임하시는 거죠.”

박 회장은 군대시절 자기의 심복부하였으며 정보장교 출신으로 순발력이 뛰어난 차명구를 가장 신임해 온 터였다. 차명구는 결혼 초에 상처한 삼십대 중반의 홀아비로서 근면 성실한 데다 딸린 자식이 없어 더욱 다행스러웠다.

갑작스런 말씀이라....”

차명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 회장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팔자속을 바꾸는 거나 다름없었다. 박 회장이 술 한잔하자며 집으로 부를 때만 해도 긴히 의논할 회사일 정도로 생각했었다.

별다른 뜻이 아나. 그냥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물어본 거야.”

박 회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미나 씬 모든 걸 갖춘 여성이랄까요, 암튼 아까운 분입니다.”

아깝다니?”

제 말씀은 지금 고통을 겪고 있으신 것 같은데, 편안하고 즐겁게 모셔져야 될 분이다 그 말씀이죠.”

그 애는 부족한 게 많네.”

미나 씨는 사려와 덕성이 갖춰진 분인 걸요. 미모 또한 그것들에 어울리고요.”

자네가 그 애 성품을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저에게도 그만한 안목쯤이야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가끔 뵈었잖아요.”

내가 오라비로서 그 애 처지를 어떻게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현재의 가정이 원만히 이뤄져야죠. 그분이 선택한 남편이니까요.”

차명구는 일부러 남편이란 말을 강조했다.

남편?”

……

몰래 도망친 작잔데?”

박 회장은 양주잔을 들어 냉큼 입 속에 털어넣었다. 미나의 임신 사실은 숨기고 있었다. 기회를 보아 몰래 수술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사실 그분은 아직 어리십니다.”

차명구는 목소리를 매끈하게 다듬어냈다. 어리다는 말은 미나의 동거 사실을 모두 눈감아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의 다음 질문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어리다는 말은 이해의 뜻인가 관용의 뜻인가?”

차명구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그는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이다가 상관에게 보고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와 관용까지를 포함한 운명의 뜻입니다. 제 아내가 죽은 사실을 이해나 관용으로 성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때다 하고 박 회장은 다그쳤다.

만일 자네가 지금 아내감을 구한다면 불장난을 저지르고 있는 미나도 의중에 둘 수 있겠는가? 농담 같은 소리지만.”

회장님의 말씀이 농담이 아니시기를 빕니다.”

정말 그래?”

박 회장은 차명구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차명구는 대답을 삼간 채 회장의 손을 꼬옥 쥐었다.

너무 취한 것 아닙니까?”

취하라고 마시는 술인데 안 취하면 어떡해요.”

미나는 잔뜩 취하고 싶었다. 폭음하여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고 사타구니를 길바닥 아무한테나 팽개치고 싶었다. 길에 지나다니는 이놈저놈 아무에게나 몸을 내맡겨 더러워진 몸을 내 몸에 부벼댐으로써 나를 오염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짓이 기껏 내가 소망하는 타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맥이 빠졌다.

그 인간은 내가 차명구와 몸을 섞는 걸 되레 좋아하겠지

미나는 복수할 길이 없다는 데에 더욱 화가 났고 더욱 술탐을 부렸다.

다섯 병 더.”

그녀는 손바닥을 활짝 펴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만 널려 있었다. 차명구는 미나의 술탐이 보기 좋았다. 미나의 몸은 취할수록 더욱 무너지기 쉬울 테고, 그래야 소유할 수 있었다. 조건이 얼마나 좋은가. 박 회장은 자기와의 결합을 바라고 있고 동거중인 사내는 여자와의 결별을 고대하고 있잖은가. 그러니 여자가 몸부림치는 건 당연할 테고 자기는 여자의 그 몸부림을 곱게 다스려주기만 하면 저절로 품에 안길 것이었다.

차 이사님.”

미나는 모처럼 차명구에게 촉촉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오늘 밤 차명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정말 취하셨군요. 저는 이사가 아니고 부장입니다. 그렇게 놀리시면 안되죠.”

놀리는 게 아녜요. 곧 그렇게 되실 거예요, 이사님으로.”

사실이었다. 차명구는 곧 이사로 승진될 것이다. 미나는 벌써 오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차 부장님.”

미나가 조용히 불렀다.

네에.”

그 남자가 왜 저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남자가 저를 좋아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

그 남자가 싫어하는 이유는 알지만 그 대책은 모르겠어요.”

싫어하는 이유를 알았으니까 싫어하지 않도록 하면 되겠죠.”

안돼요. 이젠 늦었어요. 저는 어리석은 여자예요. 손해볼 짓만 하며 살아온 여자라고요. 조심하며 살 걸 그랬어요. 조심스럽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건데 함부로 살아왔거든요. 저는 제 맘만 믿고 살아왔는데……

미나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나 씨의 매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원색적인 매력, 그 매력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런데 그 인간은 왜 제 매력을 느끼지 못할까요?”

그분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너무 예의를 차리시는군요. 그 남자는 저를 모르고 있어요. 멋대가리 없는 여자로만 여긴다고요. 바보 같은 자식!”

미나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차명구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미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어깨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러자 미나의 고개가 그의 가슴으로 기울어졌다.

 

 

나갈까요?”

차명구가 속삭이듯 말했다. 미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몸을 섞은 지 언제던가. 미나는 내 육체적 배신에 복수하고 싶었다. 그 동안 구걸하지 않고 정념을 참아온 그녀였다. 욕정을 참는 것이 내 육체적 기피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몸을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호텔은 가까웠다.

미나가 차명구와 자고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날 나는 고려대 카니발 행사장에 나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 주위에 주민들이 웅성거리고 관할 파출소 직원 하나가 나와 있었다.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직원은 나를 보자 팔목을 끌고 침침한 옆골목으로 갔다.

통금 직전이었죠. 차도에 사람이 죽어 있다는 신고를 받고 뛰어가 봤더니 길가에 어느 젊은 새댁이 쓰러져 있더군요. 술 냄새가 지독했어요. 처음에는 술 취한 여자가 차에 치여 죽은 줄 알았죠……. 확인해 보니 사모님이시데요. 그래서 얼른 방범대원 등에 업혀 집에 데려다 뉘었죠.”

솔직히 말해주쇼. 그때 어떤 짓을 합디까? 조용히 업혀가진 않았을 거요.”

직원은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아뇨, 분명 떠든 소리가 있었을 거요.”

철저히 타락할 거야. 타락, 타락, 그 말만 자꾸 되뇌었죠. 그런데 왜 차도에까지 나가셨을까요?”

그래야 내가 창피를 당할 테니까요.”

직원은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직원과 주민들을 돌려보낸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술내가 풍기는 미나 곁으로 다가갔다. 뺨을 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손을 치켜드는 순간 등골에 오싹 소른이 끼쳤다.

때려라, 나 죽고 싶어 환장한 년이다.”

나는 주먹을 내리고 점잖게 캐물었다.

이유가 뭐지? 왜 그런 행패를 부렸지?”

궁금해 할 것 없어. 특별한 이유도 없구. 그저 그냥 추태를 부리고 싶었을 뿐이야. 내 몸이 기어이 더러워졌구나 생각하니까 슬펐던 거구, 그래서 버린 몸 아무렇게나 굴리고 싶었을 뿐이야.”

몸을 버리다니?”

춤을 추다가 딴 남자와 잤거든.”

미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것 참 잘했다고 말하려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고 부드럽게 대꾸해 주었다. 그러자 미나는 자기가 더 타락하기를 바라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가 곤란해서 침묵을 지켰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타락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락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누구와 동침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런 거에 관심 둘 만큼 한가한 내가 아니잖아.”

못된 인간! 아무리 정 없는 계집이라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내는 당신뿐일 거야. 잔인한 사내!”

그럼 외간남자와 동침했다고 말하는 계집에게 누구와 살을 섞었냐고 물으란 말야? 그렇게 쓸개 빠진 사내가 있겠냐고?”

당신 화내는 모습이 참 멋지네요. 고마워요, 질투해 줘서. 그 질투를 받고 싶어 일부러 거짓말을 해봤거든요.”

거짓말? 그럼 지금까지 차명구와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거야?”

어머 되게 질투하시네. 너무 멋있어요. 당신한테 그런 질투 받고 싶어 환장한 년인데.”

얼버무리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내 직업이 뭐야. 남 눈치보는 게 내 직업이잖아. 당신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물론 나한테는 고마운 불륜이지만.”

불륜? 호호호…… 그것 참 멋있는 말이에요. 불륜이란 내가 누구의 아내란 뜻 아녜요?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아내로 여긴다는 뜻과 같잖아요? 불륜을 저지른 아내,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역시 당신은 속이 깊은 남자라구요. 겉으론 나를 부정하면서 속으론 아내로 여기니까요. 역시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미나의 웃음 띤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미나가 가여워졌다. 그래서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미나는 내 품에 안기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걸 불륜으로 생각하지 마. 우린 서로 우리의 악연을 즐기자고. 그럼 낼 출근해야 되니 어서 자도록 하지.”

나는 먼저 자리에 누웠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무슨 희망의 징조가 보일 듯싶었다. 그 희망이란 미나가 차명구와 더욱 가까워지리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미나의 태도가 갑자기 정숙해졌다. 외출도 삼가고 살림도 알뜰히 챙겼다. 시부모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잘 모셨다. 나는 그녀의 달라진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우선 집안이 평화롭다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마침 출동근무가 주춤해진 바람에 집에서 미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많았다. 월남파병동의안과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함에 따라 극도로 악화된 시국이 대학생들의 매국외교 일당국회 화형식과 무장군인 고대난입사건을 계기로 고비에 이르자 드디어 서울지구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집안의 평화는 중부서로 발령을 받은 뒤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평화가 불안했다. 언제 미나의 성깔이 발기할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일 뿐이었다. 미나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내 고운 행실이 티껍죠?”라고 뜻 모를 농담을 던졌다. 그 농담 속에는 물론 압력이 들어 있었다. 다른 아닌 사표 종용이었다. 미나는 사표 내고 오빠 회사에 들어가면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가 되겠다고 꼬드겼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착해지는 것에도 조건이 있느냐며 완곡히 거절하자 그녀의 바깥출입은 다시 시작되었다. 점점 외출 횟수가 늘고 주량이 늘었다.

 

 

 

 

 

 

 

 

 

 

 

 

 

/글 김용만·그림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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