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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나의 신앙… 이제 그 ‘신전’에서 못다 한 한을 푼다”

[조용호의 나마스테] 잔아문학박물관 관장 소설가 김용만


‘나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빨갛고 노란 꽃이나 단풍을 고운 제 색깔로 느끼지 못하는 병, 하지만 나는 그 병을 고치려고 애써본 적이 없다. 그 병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병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은 늘 문학을 나의 상식적인 삶으로 유도했다.’

2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밑바닥에서 고생을 하다가 늦깎이 작가로 문단에 나온 소설가 김용만씨. 그는 북한강가에 ‘잔아문학박물관’을 세우고 그 ‘성전’에서 자신만의 문학을 벼리는 중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라니, 하물며 그 비정상적인 상태를 좋아한다니 어떤 심리일까. 소설가 김용만(76)이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 서문에 적은 말인데, 그는 이를 ‘고통론’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도 그러했지만 설혹 안온한 행복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를 거부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문학이 그에게서 달아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문학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여하는 게 문학일진대 그는, 왜 이리 고통을 스스로 영접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문학이 꿈이었는데 그걸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한이 맺힙니다. 문학은 나에게 신앙 차원의 종교와 같습니다. 이곳은 내 문학의 성전인 셈입니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 ‘잔아문학박물관’에서 만난 김용만 관장은 자신이 일군 ‘성전’의 뜨락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자신의 별호이자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주인공 이름 ‘잔아’를 앞에 내세운 사설문학박물관이다. ‘잔아’(殘兒)는 김용만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이름인데 ‘마지막 아이’라는 뜻으로 성장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과 슬픔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의 분신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 잘나가던 서울의 살림살이를 접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래 문학도와 문인들의 공부 장소로 활용돼온 공간을 확대해 2010년 박물관을 열었다. 한국문학관, 세계문학관, 아동문학관 등 3개의 전시실에서 작고 문인들과 대표적인 생존 문인,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테라코타 흉상과 사진 자료, 희귀 문예지와 육필 등을 볼 수 있다. 여느 문학관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김용만의 아내이자 시인인 여순희(66)씨가 직접 흙으로 빚은 테라코타들이 문학관 도처에서 관람객들을 맞는다는 점이다. ‘글과 흙의 놀이터’라는 수식이 이 문학관 앞에 붙는 배경이다. 신경림 유종호 정현종 김승옥 김화영 오정희 함민복 등 생존 문인들의 테라코타를 만들고 있는데 현재 28명까지 완성된 상태다. 30명이 채워지면 따로 전시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기 양평군 문호리 ‘잔아문학박물관’ 전경.

김용만은 49세에 등단한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로 꼽힌다. 그가 문학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배냇짓’을 할 때부터였다고 하니 문학의 품에 제대로 안기기까지는 긴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 세월 동안 김용만이 걸어온 길은 ‘파란만장’이라는 진부한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머슴살이를 하다 불목하니로 들어간 부친과 눈이 먼 어머니를 둔 외아들이었다. 충남 부여에서 간신히 초등학교까지는 부모 슬하에서 마쳤지만 더 이상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어 부산으로 가출을 감행했다. 고마운 사람을 만나 부산중을 거쳐 용산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립대에 합격했지만 더 이상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제대 후 부산에서 다양한 노점 대열에 끼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기 위해 태종대 바위까지 올라갔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상황에서 자살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에 경찰 모집 공고를 접하고 간신히 물로 불린 체중으로 관문을 통과해 경찰이 되었다.

경찰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어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강원도로 임지를 옮겨가며 ‘읽고 쓰는’ 생활에 빠져들었다. 휴전선 인근 최전방 동해 바닷가에서 공비들이나 살인범을 비롯한 범죄자들과의 만남은 후일 그의 소설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경찰을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 인부와 리어카 행상을 전전하며 밑바닥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춘천옥’이라는 이름의 보쌈집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구로공단 5거리의 이 집은 연예인은 물론 정치인과 스포츠인들까지 북적이는 소문난 집으로 널리 알려져 돈을 세기조차 귀찮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종업원을 40명 가까이 거느릴 정도로 성공했을 때 김용만은 과감히 춘천옥을 접고 양평으로 내려갔다. 그대로 계속 음식점을 운영했다면 웬만한 중소기업 뺨치는 수익을 올렸을 상황이었다. 이때의 성공스토리는 KBS 라디오 일일연속극으로도 방송된 그의 장편 ‘능수엄마’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돈을 좇다가 돈을 피해 도망한 셈입니다. 남들은 왜 잘나가는 업소를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갔느냐고 안타까워하지만, 더 일찍 정리했더라면 그만큼 빨리 내 재능을 문학에 투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비록 늦게 데뷔했어도 호평이 쏟아졌는데 더 일찍 문단에 나왔더라면 좀 더 내 문학이 영글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한스럽습니다.”

이런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에 양평에 어렵게 마련한 땅을 누가 사려고 하자 두말없이 시세의 10분의 1 가격에 거저 넘기다시피 팔아버린 일화도 있다. 돈에 미련이 있었더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통탄한 일이었다. 문학이 무에 그리 대단한 것이기에 이토록 매달리는가.
소설가 김용만과 시인이자 조각가인 아내 여순희씨.

그는 여름날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멍석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유난히 좋아했던 아버지로부터 문학의 DNA를 물려받는 것 같다고 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부친이었지만 우주에 대한 호감과 상상력은 유별났다. 어린 아들은 “저 별들은 천장에 딱 박혀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방이 우주라면 요강단지 재떨이 담뱃대 모자, 저런 것들이 다 별인데, 이것이 벽이나 바닥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둥둥 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배운 티를 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둠벙에 둥둥 떠 있는 개구리마냥 그런 것인 모양”이라면서 “야, 그럼 이쪽에서 저쪽 갈라면 명주실로 몇 타래나 된다냐?”고 물었다고 했다. 몇만 광년의 별과 별 사이를 명주실 몇 타래로 표현하다니 사실 부친이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던 셈이다. 그 아버지는 어린시절 동생들 딸린 장남 처지에서 밭일을 하다 호미를 던지고 남사당패를 따라나선 적도 있었다니 뜨거운 피는 그대로 아들에게 이어진 셈이다.

“아버지도 단지 글을 못 쓰신 것뿐이지 먹고살 만 했으면 웬만한 글쟁이 못지않았을 겁니다. 눈 오는 날 밤 어두운 눈밭에서 우는 거지를 안방으로 들일 정도로 한없이 선량하던 아버지 아래서 내 허무는 배냇짓의 숙명으로 싹 튼 거지요. 어릴 때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춘천옥 시절 장사에 미쳤던 것도 허무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몸짓이었을지 모릅니다.”

1989년 ‘현대문학’에 ‘은장도’를 발표하면서 데뷔한 이래 1993년 첫 창작집 ‘늰 내 각시더’가 문단의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칼날과 햇살’ ‘인간의 시간’ 등 장편을 펴냈고 세계 100여개 국을 돌아다닌 뒤 ‘세계문학관기행’을 펴내기도 했다. 근년에는 주간신문 ‘양평시민의소리’에 3년 남짓 자전적 장편 ‘미친 사랑’을 연재했다. 뒤늦게 광주대 문예창작과와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계간 ‘미네르바’에 국내 대표적인 시인들과 시를 길게 살핀 글도 기고하는 중이다. 문학이라는 종교를 떠받드는 우리 시대 마지막 문인 그룹의 일원인 김용만은 성전을 나와 서울을 향해 비 오는 국도를 달리면서도 자주 “한스럽다”고 말했다.

글·사진=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