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관 기행


세계문학관 기행 
김용만 기행문집 / 서정시학 刊

  3년 동안 《서정시학》에 연재해온 「세계문학관 기행」을 책으로 엮는다. 인류의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호 열세 분을 모셨다. 험난하면서도 보람된 여정이었다. 세계 80여 국가를 다녀 봤지만 문학기행만큼 흥분된 코스는 없었다. 
  하지만 현장답사 말고도 작가론 작품론을 염두에 둔 기행이어서 발길이 무거웠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꺼내 읽어야 했고 자료집을 찾느라 밤을 지샐 때가 많았다.
  더구나 세계적인 대 문호의 속살을 파내는 작업이어서 새로운 관점을 캐보려는 과욕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사실에 접근하려고 애썼다. 저서나 자료 말고도 그분들이 살아온 주변의 흔적이나 지형, 일테면 산과 들, 옛길, 고목, 성벽에 낀 이끼, 개울, 호수, 강, 햇살, 바람결, 풍습, 기호, 풍문과 일화 등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의 환영(幻影)은 물론 그분들이 창조해낸 인물의 환영과도 만나고 싶어 내 의식을 뒤틀곤 했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체코에서는 프라하성(城)을 살펴보는 카프카의 예민한 눈길과 황금소로(黃金小路)를 걸어다니는 카프카의 발걸음을 눈여겨 보며 그가 불안감에 싸여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 막연한 불안감이 소속(所屬)의 의미망을 구축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라 만차 평원에서는 400년 전과 똑같이 갑옷 차림에 애마(愛馬)를 타고 달려온 돈 키호테와 포옹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둘시네아가 그립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말했다. 
  "둘시네아는 가상의 여인이잖소?"
  "그렇소. 세상에 둘시네아가 있든 없든 알 바 아니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거요. 그렇게 믿어버리면 되잖소?" 어쩌면 종교도 그런 믿음에 불과할지 모르오. 사랑도 마찬가지요. 환상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겠소?
  페테르부르크의 센나야 광장에서는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땅에 입을 대고 '내가 노파를 죽였소I" 라고 큰소리로 고해하는 모습을 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하필 창녀를 신으로 모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는 소피야가 톨스토이와 이혼하자고 야단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위대한 인류애가 '웃기는 짓'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잠자리에서 치근덕대는 사내가 성자라니.
  어쨌든 100년이 지난 지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뉴스위크 선정 세계 100대 명작 1위에 올랐잖은가.
  죽음의식이 젖어 있는 폭풍의 언덕은 일종의 통곡의 벽이랄 수 있다. 온 세계에서 슬픔과 한이 맺힌 사람들이 실컷 울고 싶어 모여드는 눈물의 성지가 폭풍의 언덕이다. 허무, 죽음, 초월, 슬픔, 장엄, 증오, 광기, 복수, 애정 등 감정의 극한적인 갈기를 느껴보고 싶어 이곳 황무지를 찾아온 사람들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처럼 유령이 되는 걸 두려워 않는 모험가들이기도 하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는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외치는 귀족 출신 장교들의 목소리와 평민들의 목소리가 어떤 뉘앙스를 지녔는지 귀를 기울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는 있지만 귀족의 '연민'과 농노의 '절망'은 목소리의 색깔부터가 달랐다.
  스트랫포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죽이는 묘책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묘책은 지구의 소멸뿐이어서 50억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그 어이없는 절망감 때문에 눈물만 흘려야 했다. 바이마르에서는 74살의 괴테가 교살 된 올리케를 아내로 삼으려 한 그 광기가 파우스트의 허무와 절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고심을 거듭했다. 
  세계 문학관 기행을 연재하면서 얻어진 가장 큰 소득이라면 내 꿈의 새삼스런 발견이었다. 문호가 되겠다는 젊은 날의 꿈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이처럼 참담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비굴한 존재'라고 타매할 정도로 죽음의식에 빠져 있는데,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 못해 생의 의미마저 잃은 내 늙은 낭만이 한심하면서도 귀엽다.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면서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외가의 성벽을 3년 동안 살폈다는 일화가 있다. 제대로 기행문을 쓰려면 제트 여객기로 12시간이 넘는 거리라 해도 최소한 두세 번은 더 가봐야 한다. 
  이번에는 내가 문호들의 이야기를 썼지만 다음에는 그분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더욱 그분들의 환영에 밀착할 것이다. 환영에서 진짜 체온이 느껴지도록 말이다. 
  거침없이 나름대로의 관점을 전개할 수 있도록 3년 동안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준 《서정시학》에 감사한다. 
김용만, <책 머리에> 중에서


                       - 차    례 -

카프카와 소속(所屬)의 의미망 / 카프카
세르반테스와 키호티즘 /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와 극점(極點)의 미학 / 도스토예프스키
타나토스와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산티아고의 비의적(秘意的) 승리 / 헤밍웨이 
괴테와 자연, 그리고 인간적 신의 욕망 / 괴테 
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 / 푸슈킨 
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 
존 스타인벡과 『분노의 포도』 / 스타인벡 
톨스토이즘과 『부활』 / 톨스토이 
살아 있는 성격책 『레 미제라블』 / 위고 
찰스 디킨스와 『위대한 유산』 / 디킨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2010.11.25 초판발행. 280페이지. 정가 22,000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