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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관 기행

책 머리에

3년 동안 《서정시학》에 연재해온 「세계문학관 기행」을 책으로 엮는다. 인류의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호 열세 분을 모셨다. 험난하면서도 보람된 여정이었다. 세계 80여 국가를 다녀 봤지만 문학기행만큼 흥분된 코스는 없었다.

하지만 현장답사 말고도 작가론 작품론을 염두에 둔 기행이어서 발길이 무거웠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꺼내 읽어야 했고 자료집을 찾느라 밤을 지샐 때가 많았다.

더구나 세계적인 대 문호의 속살을 파내는 작업이어서 새로운 관점을 캐보려는 과욕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사실에 접근하려고 애썼다. 저서나 자료 말고도 그분들이 살아온 주변의 흔적이나 지형, 일테면 산과 들, 옛길, 고목, 성벽에 낀 이끼, 개울, 호수, 강, 햇살, 바람결, 풍습, 기호, 풍문과 일화 등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의 환영(幻影)은 물론 그분들이 창조해낸 인물의 환영과도 만나고 싶어 내 의식을 뒤틀곤 했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체코에서는 프라하성(城)을 살펴보는 카프카의 예민한 눈길과 황금소로(黃金小路)를 걸어다니는 카프카의 발걸음을 눈여겨 보며 그가 불안감에 싸여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 막연한 불안감이 소속(所屬)의 의미망을 구축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라 만차 평원에서는 400년 전과 똑같이 갑옷 차림에 애마(愛馬)를 타고 달려온 돈 키호테와 포옹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둘시네아가 그립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말했다.

"둘시네아는 가상의 여인이잖소?"

"그렇소. 세상에 둘시네아가 있든 없든 알 바 아니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거요. 그렇게 믿어버리면 되잖소?" 어쩌면 종교도 그런 믿음에 불과할지 모르오. 사랑도 마찬가지요. 환상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겠소?

페테르부르크의 센나야 광장에서는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땅에 입을 대고 '내가 노파를 죽였소I" 라고 큰소리로 고해하는 모습을 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하필 창녀를 신으로 모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는 소피야가 톨스토이와 이혼하자고 야단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위대한 인류애가 '웃기는 짓'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잠자리에서 치근덕대는 사내가 성자라니.

어쨌든 100년이 지난 지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뉴스위크 선정 세계 100대 명작 1위에 올랐잖은가.

죽음의식이 젖어 있는 폭풍의 언덕은 일종의 통곡의 벽이랄 수 있다. 온 세계에서 슬픔과 한이 맺힌 사람들이 실컷 울고 싶어 모여드는 눈물의 성지가 폭풍의 언덕이다. 허무, 죽음, 초월, 슬픔, 장엄, 증오, 광기, 복수, 애정 등 감정의 극한적인 갈기를 느껴보고 싶어 이곳 황무지를 찾아온 사람들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처럼 유령이 되는 걸 두려워 않는 모험가들이기도 하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는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외치는 귀족 출신 장교들의 목소리와 평민들의 목소리가 어떤 뉘앙스를 지녔는지 귀를 기울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는 있지만 귀족의 '연민'과 농노의 '절망'은 목소리의 색깔부터가 달랐다.

스트랫포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죽이는 묘책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묘책은 지구의 소멸뿐이어서 50억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그 어이없는 절망감 때문에 눈물만 흘려야 했다.

바이마르에서는 74살의 괴테가 교살 된 올리케를 아내로 삼으려 한 그 광기가 파우스트의 허무와 절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고심을 거듭했다.

세계 문학관 기행을 연재하면서 얻어진 가장 큰 소득이라면 내 꿈의 새삼스런 발견이었다. 문호가 되겠다는 젊은 날의 꿈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이처럼 참담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비굴한 존재'라고 타매할 정도로 죽음의식에 빠져 있는데,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 못해 생의 의미마저 잃은 내 늙은 낭만이 한심하면서도 귀엽다.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면서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외가의 성벽을 3년 동안 살폈다는 일화가 있다. 제대로 기행문을 쓰려면 제트 여객기로 12시간이 넘는 거리라 해도 최소한 두세 번은 더 가봐야 한다.

이번에는 내가 문호들의 이야기를 썼지만 다음에는 그분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더욱 그분들의 환영에 밀착할 것이다. 환영에서 진짜 체온이 느껴지도록 말이다.

거침없이 나름대로의 관점을 전개할 수 있도록 3년 동안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준 《서정시학》에 감사한다.

2010년 10월 9일

소설가 김용만

목차

3

카프카와 소속(所屬)의 의미망 .... 카프카

세르반테스와 키호티즘 ....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와 극점(極點)의 미학 .... 도스토예프스키

타나토스와『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산티아고의 비의적(秘意的) 승리 .... 헤밍웨이

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 .... 푸슈킨

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

괴테와 자연, 그리고 인간적 신의 욕망 .... 괴테

존 스타인벡과 『분노의 포도』 .... 스타인벡

톨스토이즘과 『부활』 .... 톨스토이

살아있는 성격책 『레 미제라블』 .... 위고

찰스 디킨스와 『위대한 유산』 .... 디킨스

 

 

 

카프카와 소속(所屬)의 의미망

비엔나에서 합스브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인 쉔브룬(Schonbrunn)을 둘러보고 곧장 프라하로 출발했다. 리무진 버스로 6시간을 달려야 하는 그 여로의 끝자락에는 내가 ‘찾아 헤맨’ 카프카가 머물고 있다.

정말이다. 나는 오랜 세월 카프카를 찾아 헤맸다. 서점, 극장, 패션가, 카페, 사진관, 빌딩 광고, 연극 포스터에도 존재하고 심지어 내 서재에도 존재하는 그 흔하디흔한 카프카를 나는 진정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의식 속에는 그가 인간이면서 인간의 전형을 비켜난 존재로 입력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연구서가 수천 권을 넘을 만큼 친숙한 이름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세계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름이지만 내게 있어 카프카는 무슨 암호처럼 안개에 가려진 작가였다.

카프카의 이미지가 그처럼 낯설게 인식된 까닭은, 그가 죽은 지 84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카프카의 작품이 기존 틀과 아주 어긋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신비의 세계를 체험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마력은 시공을 초월한다.

요컨대 난해성이 독자를 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잠을 깨워주는 셈이 된다. 불안, 고독, 소외, 부조리, 고뇌, 좌절 등 어두운 관념어들을 독특한 언어 조탁을 통해 소름끼치는 환상세계로 형질변경시킨 카프카의 조화(造化)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홀리고 있다는 말이다.

버스가 비엔나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기사가 <프라하의 봄>을 틀어준다.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보다 훨씬 길고 노골적인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는데,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의 나체와 까만 음모가 보일 정도로 리얼한 장면이 많았다. 두 번째 틀어준 <글루미 선데이>는 버스 여행과 어울리는 고전 영화였다. 순결한 사랑과 역사적인 비애가 우울한 선율로 녹여진 그 영화는, 수많은 사람을 자살로 몰고간 노래 <그루미 선데이>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으로 언제 보아도 새롭게 가슴을 울린다.

어둠이 깔려서야 프라하에 도착하여 볼타바 강가에 있는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버스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흐릿챠니 언덕에 올랐다. 평평한 정상에 성이 나타난다. AD 870년 보헤미아 독립국의 보리보주 왕자가 세운 중세풍의 육중한 프라하 성이다. 그 성은 궁궐, 교회, 미술관, 박물관, 광장 등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카프카가 자주 산책했고 그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성에는 아침부터 각국의 관광객이 번다하다. 정상에 세워져 프라하 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왕궁은 모두 개방돼 있고, 그 안에는 대통령 집무실도 있다. 궁정 앞 광장을 에두른 르네상스 식, 바로크 식 등 고풍스런 건물들이 역사의 하중을 드러낸다. 왕궁 정문 양편에 세워진 제우스와 티탄의 두 석상의 모습이 아주 역동적이다.

언덕을 내려가며 비트성당에 들렀다. 체코 4대 성인 중 하나인 초대 왕 바츨라프1세가 창건한 비트성당에 들어가려고 길게 줄을 선 골목에는 고풍스런 비카르카(Vikarka)식당이 있어 오픈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비트성당 근처에 있는 황금소로(黃金小路)에 갔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인데 길가의 집들은 모두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 거리는 원래 성안에서 일하던 집시와 하인들이 거주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나, 나중에는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벌서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는 선물 가게, 레코드 가게, 서점 등이 들어서 있다. 그 황금소로 중간쯤인 22번지에 카프카가 집필하던 집이 있다. 30대 초반에 카프카는 그의 막내 누이동생 오틀라의 도움으로 약 반년에 걸쳐 이곳에 머물게 된다. 오틀라는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빠 카프카를 이해하고 아껴준 혈족이다.

드디어 카프카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도 역시 카프카답다. 마당 복판에는 파란색의 조형물로 된 두 남자의 벌거벗은 입상이 서 있고, 그들은 마주보고 서서 성기로 오줌(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 쪽 마당에는 카프카의 이니셜인 육중한 K자가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너른 공간에 현대적인 시설로 꾸며진 전시관 입구에는 카프카의 입상이 서 있고 그 옆에 설치된 판매대에서 노파가 책과 잉크, 볼펜, 사진, 엽서, 열쇠고리 등 문화상품을 팔고 있다. 전시실 내부를 차례로 관람했다. 카프카의 저서, 가족사진, 육필원고, 일상용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허공에 걸려 있는 여인들의 유리판 속 얼굴이 인상적이다. 처음 약혼한 펠리체 바우어와 카프카의 숱한 연서를 받은 밀레네 등 카프카와 인연이 얽힌 여인들로 그 중에서도 도라 디아만트의 얼굴이 가장 육감적이다. 20대인 디아만트는 카프카와 처음 동거한 여성이며 카프카가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작별한 키를링 요양소에까지 동행한 연인이다.

카프카에게 있어 문학은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당위였다. 독신과 채식을 고집한 카프카는 허위가 진실이 되어버린 현실세계와 맞서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문학이란 주먹으로 뒤통수를 때려서 각성시켜주는 것이며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썼다.

소년시절부터 스피노자, 헤겔, 니체 같은 철학자에 빠졌던 카프카는 원죄와도 같은 상처를 지닌 채 이방인으로 태어난 셈이다. 프라하의 도심과 유대인의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와의 중간지점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정통적인 동방 유대인이 아닌 유럽화한 서방 유대인이었으며,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이 아니고,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고, 관청에 다녔지만 진정한 관리도 아니었다. 그는 관료의식이 없었다. 프라하 노동자 재해보험국 법규과에 근무하면서도 밤에는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소설이라고 하는 반역행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카프카는 그의 작품 주인공들처럼 중간적 위치에 머문 ‘경계적 존재’였다. 이 경계지대에서 그는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과율과 합목적성이 부정된 세계를 본 것이다.

전쟁과 인간성 파괴의 먹구름이 드리우던 20세기 초의 위기감과 요세프 1세의 해방령(유대인 거주 자유)에도 불구하고 아직 잔존하는 유대인에 대한 관습적인 배타가, 민감한 카프카의 체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가 1921년 10월 29일자에 쓴 일기를 보면 짐작이 간다.

고독한 내면세계와 공동사회 사이의 이 경계지대에서, 나는 거의 밖으로 넘어선 적이 없다. 나는 내면세계보다는 이 경계지대에 보다 더 오래 정착해 있었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실존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일반 대중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으며 획일적인 규격품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자연히 어디에든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소속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카프카는 유고(遺稿)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썼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과 동시에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요컨대 인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법은 법률규범을 의미한다기보다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약속이나 체계를 의미하며 신이나 종교적 율법, 관료주의나 경제 이데올로기 등으로 확대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방대한 경제구조는 공동사회의 기능적인 역할을 잘 감당하는 인간만을 선호한다. 자기 자신의 개성과 본래성은 용인될 수 없다. 개별성은 악의 개념이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본래성을 인식했다가 추악한 딱정벌레가 되고 말았으며, 『투쟁의 기록』에서는 인간을 “은박지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들”로 묘사했고, 미완성 작품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에서 주인공 라반은 자신을 주체적인 ‘나’가 아닌 회일적이고 기능화된 세인(世人)이라고 불렀다. 세인으로서의 인간은 사랑이니 영혼세계니 하는 중심 가치가 거부된다. 개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거니와, 카프카는 그것들을 딱정벌레처럼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사물로 형상화한다.

카프카의 세계에 있어 직업이야말로 현대인간의 유일한 존재형태였다. 현대 인간에게 직업은 신이다. 어떤 식으로 자기 직업을 신앙하느냐, 하는 그 절대복무가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다. 카프카는 그 절대복무의 층위도 형상화했는데, 그 작품들은 감동의 단계를 넘어 가슴을 찢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런 직업의식은『단식 광대』에서도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굶는 것이 전문인 서커스단의 광대가 동물들에만 쏠려 있는 관중의 관심을 자기에게 되돌리기 위해 몇 달 동안 굶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굶는 일에 충실했다가 짚 쓰레기와 함께 매장되고 만다.

“저는 일년 내내 단식을 해서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주려 했습니다.”

광대가 죽어가면서 감독에게 한 말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우리 속에서 혼자 외롭게 굶기만 한 광대는 그렇게 “단식 예술”에 희생되는 순교자가 되고 마는데, 직업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카프카 작품의 핵심 주제를 여실히 입증한다.

『변신』에서는 그레고르 아버지가 직장에서 입고 일했던 은행 사환의 제복을 집에 돌아와서도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람이 제복을 입는 게 아니라 제복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단편 『유형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형 집행관인 장교에게 있어 처형장치를 조정하는 일은 바로 그의 신앙행위나 진배없다. 그의 직업에 대한 애착 앞에서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온 사형집행제도가 바뀌는 사실을 알고 그 참혹한 처형장치에 직접 누워 자신을 죽인다. 장교는 “자이 게레히트 sei gerecht(본분을 지켜라)"라고 씌어 있는 쪽지를 그의 의도대로 작동되는 제도기 속에 넣어 죄수 대신 자신의 몸을 처형기의 써레로 작살내는데, 그 죽음이야 말로 직업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며, 그 제물은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짜릿한 감동을 느끼게도 한다.

이처럼 잔혹에서 슬픈 연민을 느끼게 하는 카프카 작품의 비의(秘意)에 홀린 독자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이름과 작품이 시공을 초월하여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셰익스피어나 괴테이래 지금까지 세계의 문예비평가들이 가장 많이 텍스트로 다뤄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예비평가 한스 마이어가 <카프카, 정녕 끝이 없는 것일까?> 라는 논문을 썼듯이 상징, 비유, 병치, 풍자, 위트, 패러독스 등 카프카의 언어유희 장치로 교직된 모든 작품의 비의적인 난해성, 다의성, 부조리 등은 역사적 배경이나 연구 주체의 방법론에 따라, 실존주의 시각으로, 형식주의 시각으로, 맑스주의적 시각으로, 실증주의 시각으로, 카발라 세계의 시각으로, 리어리즘 시각으로, 환상문학 시각으로, 초현실주의 시각으로, 정신분석적 시각으로 그 관점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카프카는 꿈과 잠과 명상을 통해서나,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되려는 비몽사몽 중에 작품의 착상이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독자 역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낯선 정신세계와 비인간적인 현실세계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요컨대 초현실적인 세계와 사실세계, 환상적인 세계와 일상적인 세계,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상황이 발생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착각 속에 빠진다는 말이다. 더구나 카프카는 신비한 세계를 다루면서 아주 능청스런 사실적인 묘사로 상황을 객관화 시킨다. 예를 들어 『사냥꾼 그라쿠스』에서는 산자와 죽은자와 비둘기의 위치가 너무 자연스럽다.

“당신(죽은 사냥꾼)이 온다는 말을 간밤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참 자고 있었지요. 그때가 자정쯤이었는데 아내가 살바토레, 하고 내 이름을 부르더니 ‘창가에 있는 비둘기를 좀 보세요!’ 하더군요. 그건 분명 비둘기였는데 수탉만큼이나 컸습니다.그 비둘기가 내 귓전으로 날아와 ‘내일 죽은 그라쿠스가 올 테니 그를 시(市)의 이름으로 맞이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죽어 들것에 누워 있는)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이고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렇습니다. 비둘기가 나보다 앞서 날아갔지요. 그런데 시장님, 내가 리바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뢰비 가문의 율리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육점을 경영한 아버지 혈통은 사업력과 지구력과 정복력이 강한 반면, 어머니 뢰비의 혈통은 고집이 세고 민감하며 정의감이 강했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의 성격에 가위눌려온 카프카는 끝내 아버지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는 훗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저는 카프카의 가통이지만 어머니 쪽인 뢰비가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의 표시인지는 몰라도 뢰비가의 민감성을 타고 난 것만은 사실이다.

카프카의 일생을 조감할 때 아버지와의 불화와 막스 브로트와의 우정 관계가 맨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을 관료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어린 카프카의 내성적인 싹수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거칠게 다루기 시작한다. 어느 추운 겨울밤에 어린 카프카가 물을 달라고 칭얼대자 성난 아버지는 카프카를 내복 바람인 채 발코니로 내쫓고 문을 걸어 잠근 적도 있는데, 자식에 대한 남다른 기대가 강박관념으로 작용한 탓이겠지만 카프카는 평생 그 공포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간섭이 심하면 심할수록 카프카의 성격은 더욱 예민해졌던 것이다.

카프카에 대한 아버지의 집념은 한시도 변하지 않았다. 문학이나 예술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헤르만은 장남인 카프카의 신분 향상을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보낸다. 카프카는 법률공부를 시키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프라하의 독일계 학교인 카를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은 하되 독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듣기도 했으며,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1년간 법관 수업까지 마쳤으면서도 결국은 법조계를 떠나 보험화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 보험 업무가 일이 많아 소설 쓸 시간이 없자 노동자 재해보험국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그 무렵 카프카는 창녀들에게 몸을 맡길 정도로 불안하고 뭐에 의지하고 싶어 했는데, 그런 마음을 친구 브로트에게 소상히 고백한다.

“나는 내게 다정한 손길을 줄 그 누군가를 꼭 찾아야 해. 어제는 창녀와 호텔에 갈 만큼 절박했어”

1908년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카프카가 영원한 친구 막스 브로트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인 1902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 카프카는 대학시절에는 프라하 독일 대학생들의 독서클럽이 주관하는 연설 행사 및 시 낭송회에 즐겨 참가했는데 거기서 브로트를 만난 것이다. 브로트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대하여 강연했던 것이다. 시, 소설, 희곡, 연극, 음악비평 등 예술의 전 장르에 걸쳐 명성을 날리던 브로트는 신문이나 잡지의 비평과 강연 등을 통해서 카프카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으며, 카프카는 자기 작품에 대해 늘 브로트와 상의했다.

평생 카프카와 붙어지낸 브로트는 자신의 일을 미뤄둔 채 카프카와 여행도 같이하고 그의 창작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카프카가 죽을 임시에는 그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사랑하는 막스, 이번에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네. 폐렴인가 보네....이번 기회에 책으로 엮어진『선고』,『변신』,『유형지에서』,『시골 의사』와 단편집 『단식 광부』,『관찰』중 몇 개의 스케치만을 남겨두고, 그 외의 내 글은 모두 불살라주게.”

하지만 브로트는 처음부터 카프카의 부탁을 거절할 마음이었다. 그는 카프카의 천재성과 작품의 우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정하고 아꼈으며, 카프카 작품의 출판을 의무로 여겼던 사람이다. 브로트는 카프카 사후 즉시 작품들을 출판하기 위해 유고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소수의 지식층에만 알려져 있던 카프카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란 프라하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카프카의 친구이자 작가인 빌리 하스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18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이 패하자 프라하는 독립한 체코슬라바키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데 카프카는 그런 시대의 변화를 고스란히 프라하에서 겪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악마적 톤으로 묘사한 대상은 합스브르크가의 통치 세계였다. 훗날 그의 세 누이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파시즘이 아니라 파시즘이 발흥하기 훨씬 이전, 유럽 중심가에 새벽안개처럼 퍼져 있는 그 기분 나쁜 막연한 불안감은 카프카를 통해 악마적인 실체(창작물)로 드러났던 것이다.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큰 프라하는 당시 인구 50만 중 90% 이상이 체코인이었지만 도시의 중심부에서 사회적인 상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주민은 독일인들로(독일계 유태인을 포함하여) 자본과 문화시설을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1년의 보헤미아 박람회를 계기로 체코인의 민족의식이 점차 싹트게 되면서 반발이 거세지는데, 1897년 ‘12월 폭동’에는 반 유태적인 정서가 첨가되어 이때부터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1918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망하자 곧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는데,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와중에서도 카프카는 프라하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중심부를 떠난 일이 거의 없었다.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생가,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아버지의 점포 등이 거의 모두 100미터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반면에 이 무렵 도시의 면모는 크게 변하였다. 도시의 중심 시가지는 도시정화사업에 의하여 집이 모두 헐리고 비엔나 양식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카프카의 의식은 과거의 우중충한 유태인 거주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상실의 원죄를 걸머지고 태어났다. 그의 온 생애에 걸친 고뇌와 노력은 어떻게 해서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세계에 소속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었다. 이제 카프카는 온전히 세계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정화시키는 데에 대표주자로 뛰고 있다.

그처럼 카프카적인 세계는 자기 나름의 실험이나 사상체계에 의해 정립된 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단순하게 열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리스 블랑쇼는 오직 카프카 한 사람만이 소유하는 사상이어서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좋다, 나쁘다, 라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썼다. 즉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며, 수수께끼 같고, 오직 카프카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인데 그게 카프카의 단독성(單獨性)이다.

현실세계가 불안할수록 이상세계의 윤곽은 더 확연히 드러나는 법. 카프카는 독일계 학교를 다니고 독일어를 썼지만 프라하의 상류층 독일인들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오니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때문에 카프카는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혐오하고 억압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는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성명서를 만들고 사회주의 서클에서도 활동한다.

1907년 『시골에서의 혼례 준비』를 쓰기 시작한 카프카는 이듬해 휘페리온 지에 처음으로 8편의 산문을 발표한다. 1910년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유대인 극단원 이차크 뢰비를 만나 우의를 다지는가 하면, 브로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며 창작의 지반을 다진다. 차츰 필력이 붙은 그는 1912년 한 해 동안에만 장편소설 『실종자』를 구상하고, 첫번째 작품집 『관찰』을 출판하고, 단편 『선고』를 발표하고, 중편 『변신』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브로트와 함께 바이마르와 융보른을 여행하고, 브로트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프라하에서 최초로 『선고』의 공개 낭독회를 갖는다.

카프카 작품의 특색은 작품마다의 형식이나 인물이 작품의 문맥에 따라서 기능이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 “형식이나 인물을 일률적으로 동일 선상에 놓고 규격화하는 것은 위험하다.”(엠리히의 <카프카론>) 그의 모든 작품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그의 독특한 비유 세계나 언어의 독특한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그의 대표작인 중편소설 『변신』에서는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레고르는 가정의 선량한 아들이며 회사에서는 모범적인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가정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존재였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빨리 부모의 부채를 갚고 퇴직해서 자기가 원하는 생활을 갖고 싶어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소망 때문에 ‘소속’에서 추방되어 벌레가 된 것이다.

장편소설 『소송』에서도 주인공 요제프 K가 서른 살 되는 날 아침, 자고 난 하숙집 침실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낯선 두 사나이에 의해 체포된다. K는 아무 죄도 없거니와 그가 찾아간 법원도 초라한 임대주택의 다락방인 데다, 합법적인 재판이나 판결도 없이 처형당한다. 여기에서 죄, 법, 법정은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와의 파혼으로 입게 된 죄의식이 모티브로 작용했는데, 카프카는 일기에서 파혼 장소인 베를린의 아스카니셔 호텔을 ‘법정’ 혹은 ‘법원’으로 표시했고,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기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체험(파혼)을 초월적인 차원, 즉 그 ‘알 수 없는’ 법이나 법정의 차원으로 심화시키는데, 미완성 작품인 『소송』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함께 20세기 독일어권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카프카 작품의 신비성과 난해성은 낯설게하기 식의 표현법과 같은데, 그 낯설음은 카프카의 반역정신에서 싹이 텄다고 볼 수 있다. 카프가의 작품들에 그려져 있는 것은 일상의 이치나 습관이 거의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이다.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빈 교외의 키를링 요양소에서 요양 중 1924년 6월 3일 눈을 감은 카프카는 6월 11일 프라하에 묻힌다. 그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밀란 쿤테라의 고향인 브르노(Brno)로 떠나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냥 지나치게 되어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 나는 무덤을 찾아가 이렇게 묻고 싶었다.

“카프카씨, 당신은 무덤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어떤 처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보험회사 업무보다 소설쓰기에 더 미쳐 지낸 그 무거운 죄 때문에 지금도 엄청 시달리겠죠? ‘소속’을 일탈한 죄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잘 아시면서, 회사 일만 잘할 게지 왜 소설을 탐했나요?” (끝)

세르반테스와 키호티즘

흔히 인간의 성격 유형을『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눈다. 전자가 행동없이 생각만 하는 유형이라면, 후자는 생각 없이 행동만 하는 유형이다. 세르반테스는 소설 『돈 키호테』에서 편력기사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從者) 산초 판사의 독특한 성격을 창조함으로써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묘사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돈 키호테의 고매한 이상주의는 산초 판사의 저속한 물질주의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서로 상보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데 돈 키호테는 꿈을 좇는 강한 투사형의 전형으로, 산초는 착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 대변된다.

스페인의 유서 깊은 도시 그라나다에서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23년 만에 다시 세르반테스의 발자취와 소설『돈 키호테』의 무대를 답사하게 된 셈이다. 1987년에는 수도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거쳐 라 만차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이웃 나라인 포르투갈과 모로코를 거쳐 라 만차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리스본 관광이 끝나자 우선 모로코부터 다녀올 생각이어서 국경 쪽으로 향했다. 스페인으로 넘어가 세비야에서 하룻밤을 자고 지부랄타 해협으로 빠질 참이었다.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내 정서에 맞는 험한 산협이 이어진다. 산비탈에 일궈놓은 과수원마다에는 겨울철인데도 이름 모를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 있다.

산협을 넘자 끝없이 너른 안달루시아 평원이 펼쳐진다. 차분하게 속도를 유지한 버스는 어둠이 깔릴 무렵에야 안달루시아의 주도(州都)이자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세비야에 도착했다. 전설적인 인물 돈 후안의 여성 편력을 비롯하여 비제의 <카르멘>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무대로 유명한 세비야.

나는 일행과 함께 비를 맞으며 돈 후안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보고 스페인광장에 있는 미술관도 관람하다가 지부랄타 해협의 관문인 사리파 항으로 향했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해협을 건넌다는 기대와 맹인 가수 로드리고의 애수 어린 노래가 어우러진 코치투어였다. 파도가 높아진 탓에 밤이 늦어서야 페리호를 탈 수 있었지만 모로코의 관문인 탕제르 항의 야경에 취해 나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호텔방에 들었다.

이튿날에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버스를 탔다. 아침에 탕제르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모로코의 고대 도시 페스에 도착했다. 인구 65만의 페스는 이드리스 왕조의 도읍지이며, 항구도시 카사블랑카와 수도 라바트에 다음가는 큰 도시로 구시가지는 12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페스에서 저녁을 먹고 전통공예품과 가죽제품 등으로 유명한 재래시장 메디나를 구경한 다음, 영화를 통해 추억의 도시로 각인된 카사브랑카까지 4시간여를 더 달렸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모로코의 수도 리바트를 거쳐, 다시 지부랄타 해협을 건너와 피카소의 생가가 있는 스페인의 휴양도시 말라가에서 짐을 풀었다.

이튿날은 고대 도시 코르도바로 향했다. 말라가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평원은 온통 올리브나무 농장으로 뒤덮여 있다. 메세타(산언덕 분지) 지형에 드러난 하얀 집들은 안달루시아 평원의 전형적인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안달루시아는 세르반테스가 세리로 있을 때 세금을 받으러 다닌 곳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코르도바에서는 한꺼번에 25000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메스키따 이슬람 사원을 구경하고,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이었다가 다시 가톨릭 국가로 회복된 그라나다로 가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하고 호텔에 들었다.

그라나다를 출발한 버스는 어느새 라 만차 평원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황량한 분지와 들판이 열리자 금방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드디어『돈 키호테』의 배경인 라 만차 평원을 달려본다는 낭만이 일순간 호흡을 막았던 것이다. 라 만차는 내 뇌리에 낭만 어린 땅으로 입력되어 있다. 맑은 햇살, 끝없는 평원, 엔씨나레스 숲, 평원을 뒤덮은 올리브나무는 항상 내 눈에 선하다.

『돈 키호테』의 배경 중에서 나는 돈 키호테가 여관 주인에게 세례를 준 깜뽀 데 또보소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공격했던 깜뽀 데 끄리프따나를 차례로 답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또소보는 여관의 흔적도 없고 아무 표시도 없어 곧장 깜뽀 데 끄리프따나로 향했다. 가이드는 돈 키호테의 실제 배경이나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확실히 입증된 장소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곳 라 만차 평원이 세르반테스의 출생지이며『돈 키호테』의 무대인 것만은 확실하다.

또소보를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U턴한 버스는 1시간쯤 달려 깜뽀 데 끄리쁘따나에 도착했다. 안내서에 약 이천 명쯤 되는 주민들이 풍차와『돈 키호테』를 상품화해서 관광수입을 올린다고 적혀 있듯이, 시골 면 소재지 크기의 끄리쁘따나는 규모는 작지만 무척 활기차 보였다.

도심을 지나온 버스가 한가한 언덕길에 멈추자 나는 차에서 내려 풍차가 흩어져 있는 분지 복판으로 바삐 걸어갔다. 눈물이 나올 만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로시난테의 안장에 올라타고 창을 든 돈키호테의 앙상한 환영이 다가왔다.

그 어이없는 자태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이상주의자로 환원된다. 찌들고 탈색된 내 육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상주의가 돈 키호테를 만나는 순간 다시 활개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돈 키호테가 로시난데의 등에서 내려와 나를 부둥켜안는다.

“잘 오셨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자그마치 400년 동안 기다린 거요. 그 사이 산초도 늙고 애마도 늙고 둘씨네아 공주님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오.”

목 메인 소리로 인사를 마친 돈키호테는 멍하니 유채꽃이 만발한 평원을 바라본다. 아마 둘시네아 공주가 그리운 모양이다. 상상의 여인을 그리워하는 돈 키호테의 그 진실한 모습에 나 역시 기분이 울적해진다.

“돈 키호테씨, 당신은 현실과 싸우느라 세월을 잊어왔지만 나는 비현실과 싸우느라 몸이 이렇게 삭았다오.”

“나도 삭을 대로 삭았소. 나는 400년 동안 상상의 세계를 꿈꿔왔지만 이젠 정말 지쳤소.”

“아뇨. 당신이 신봉한 정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인류의 가슴을 울리고 있소. 당신의 이상주의는 이제 영원한 보편성을 획득했소. 키호티즘(Quixotism)은 현세주의로 퇴락한 인간의 고매한 정신을 되살리는 복원력으로 작용할 거요. 당신은 영원한 승리자요.”

“당신은 종교를 만들었잖소.”

“천만에요. 그건 종교가 아니라 어리석은 도그마일 뿐이었소. 나는 평생 그 어리석은 독단에 빠져왔소. 세상을 잘 못 산 거요. 허무와 싸우는 게 아닌데..... 허무와 싸웠으니 남은 게 뭐겠소. 고통밖에.”

이번에는 내가 돈키호테의 메마른 몸을 끌어안는다. 그때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려오자 돈키호테의 환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언덕에 홀로 서서 땀을 훔치는 초라한 여행자로 남아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 환멸에 맥이 풀린다.

밤에는 황혼부터 동틀 무렵까지, 낮에는 동틀 무렵부터 어두울 때까지 기사소설을 탐독해온 몰락한 시골 귀족 알론소 키하노는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병사로, 여관을 성으로 여길 만큼 무용담에 빠져 종국에는 자신이 읽은 허황된 세계를 모두 사실로 믿게 된다. 모험을 좇는 편력기사가 되어 자신의 명망을 온천하에 떨치고 싶은 그는 ‘어떤 미치광이도 가져보지 못한 기이한 공상’에 빠져 자기가 아니면 이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의 손실이 크다.

알론소 키하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옛날에 증조부가 쓰던 낡은 무기들을 꺼내어 녹을 닦고 손질하는 일이었다. 창검과 방패를 정리하여 갑옷제구한 그는 자기 몸뚱이처럼 비쩍 마른 말을 타고 편력기사의 위용을 갖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그 위용에 어울리도록 돈 키호테라 정하고 나니 다른 편력기사가 그러했듯 종자가 필요했다. 그는 이웃에 사는 착하고 머리가 좀 아둔한 농부 산초 판사를 만나 구슬리기 시작한다. 온갖 달콤한 말에다, 자기가 모험하여 섬을 얻게 되면 그 섬의 총독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으로 산초의 마음을 산다.

드디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출정 길에 오른다. 돈 키호테는 창을 든 채 애마(愛馬)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는 짐보따리를 챙겨 자기네 나귀를 타고 모험의 장도에 오른다.

돈 키호테는 산초를 데리고 편력 중에 첫 번째 공적을 이루자 이번에는 그 공적을 바칠 사모하는 여인이 필요했다. 편력기사가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당연했다. 사랑 없는 편력기사는 “잎새와 열매가 없는 나무요, 영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았다. 돈 키호테는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떤 거인과 겨뤄 단숨에 그놈을 때려눕히든가 몸뚱이를 반으로 동강내든가 그놈을 이겨서 항복을 받아낸다면 그놈을 갖다 바칠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래서 선택한 여인이 시골 처녀농부 알돈사 로렌소인데 ‘사람들 말로는’ 돈 키호테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돈 키호테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그 처녀농부를 마음속에 담기로 작정한 돈 키호테는 자신의 위상과 어울리고, 공주나 귀부인에게도 합당한 이름을 찾던 중 마침내 둘시네아 델 또보소란 이름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 상상 속 여인을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존재로 신격화시키고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의 이상세계에 모셔진 지고의 신이며, 그 신을 통해 돈 키호테는 자신의 정의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힘을 얻고 투지력을 키운다. 그런데 돈 키호테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인 듯이 행동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환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세상에 둘씨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돈 키호테의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저자 세르반테스의 역량에 놀라는데, 그 경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어찌 보면 종교도 그런 믿음에 불과할지 모른다. 훗날 산초가 둘시네아의 실체인 알돈사 로렌소의 생김새와 성격을 폄하면서, 로렌소는 동네에서 고함을 잘 치고, 떠벌리길 좋아하고, 몽둥이를 잘 휘두르는 여자라고 폭로하자 돈 키호테는 이렇게 응수한다.

“산초야, 시인들이 예찬하고, 책이나 로망스에 등장하고, 이발소나 극장에서 이름이 거론된다고 해서 모두 뼈와 살을 가진 여인들이라고 생각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시인들이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용기 있는 남자로 묘사하고 싶어 가공해낸 인물이란다.”

보잘것없는 여자를 절세의 고귀한 공주로 받드는 돈 키호테적 사랑. 사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다소 돈 키호테적이랄 수 있고, 여성들은 그런 착각에 홀리기 십상이다.

세르반테스는 현실은 진짜가 아니고 가상이나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었다. ‘진실과 꿈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주인공 돈 키호테는 우스꽝스럽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그의 자유의지와 가치관이 빚어낸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믿는, 즉 자신이 만든 이상향을 자신이 굳게 믿도록 자신을 의식화시킨 의지적인 인물이다.

깜뽀 데 끄리쁘따나에서 사진도 찍고 분지에 있는 마을 카페에 들어가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로 크리프타나를 떠나 멀지 않은 마을 뿌에르또 라삐쎄(Puerto Lapice)로 가서 관광지가 된 주막에 들렀다. 돈 키호테 무대로 설정해서 장사를 하는 게 기특할 정도다. 그럴 듯하게 우물과 두레박이 있고, 그 옆에 철로 만든 돈 키호테의 상이 서 있어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기분이 달뜬 나는 주막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카페 직원들과 사진도 찍었다. 마을을 나오다가 근처 가게에 들러 돈 키호테 상과 볼펜을 사고 곧장 톨레도로 향했다.

스펜인의 대표적인 고도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톨레도에 가까워지자 햇살에 반짝이는 주황색 도시가 시야를 압도한다. 중세의 이미지가 그대로 보존된 톨레도는 도시 외곽을 에두른 타호강이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지만, 숱한 전쟁과 왕조의 부침이 그 고대도시의 얼룩진 역사를 말해준다. 기원 전 2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되고, 그후 5세기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서고트족의 왕국 수도가 되고, 711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1085년에는 가톨릭 세력이 이슬람을 몰아내고,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는 파시스트 세력(프랑코 총통)과 인민전선 측이 교전을 치르기도 했다. 톨레도는 중세의 흔적 말고도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전설과 미로처럼 퍼져 있는 2000개가 넘는 골목길이 유명하다.

따호강가의 언덕에 세워진 버스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시가지의 골목길로 올라섰다. 산토 토메 성당에는 여전히 인파가 밀린다. 몸이 밀리는 대로 흘러 성당 안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엘 그레꼬의 종교화 <오르가스(Orgaz) 백작의 매장>이 시선을 압도한다. 위는 천상의 세계, 아래는 지상의 세계, 중앙은 오르가스의 영혼인데, 엘 그레꼬는 비구상의 큰 문을 연 화가로 중심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토메 성당을 나와 톨레도 대성당으로 가서 엘 그레꼬의 전시실 사끄리스티아(Sacr'sto'a)를 둘러보았다. 거기에 있는 <베드로의 눈물>에서 닭의 그로테스크한 형상 역시 예수의 말(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을 이미지로 크게 부각시킨 장면이다.

시내 상가와 유서 깊은 알카사르 성을 둘러보고 다시 강가 언덕으로 나와 어스름이 깔리는 평원을 내려다본다. 그 평원 어디쯤에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살던 곳이 있을 것이었다.

스페인 문학과 예술의 황금세기(Golden Age. 16-17세기)로 불리는 1547년에 태어났으며, 근대적인 성격소설을 창시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그의 생존 시기는 중세의 신본주의가 쇠퇴하고 새로운 인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전환기와 맞물려 있다. 아직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진행중이고,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개성과 합리성은 착지(着地)가 불안한 채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며, 현세적 욕구만이 분출하여 정의는 퇴색되고 사회 부조리는 두께를 더해갔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그의『소설의 이론』에서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절망 상태에 놓인 위대한 신비주의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던 시대, 쇠퇴해가는 종교(가톨릭)를 재생시키려고 광적으로 시도하던 시대, 새로운 세계인식이 신비적인 형식 속에 등장하고 있던 시대, 실제로 체험은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목적을 상실한 채 시도적으로만 찾던 신비주의의 시대라고 정의했는데, 그것은 고삐가 풀려버린 마성(摩性)의 시대이자, 지속되어온 가치체계 내부에서 거대한 혼돈이 발생하고 있던 시대라고도 했다. 루카치는 또 이렇게 썼다

기독교 신자이자 천진난만하고 충성심이 강한 세르반테스는 인물을 형상화하면서 그런 마성적 문제성의 가장 깊은 본질을 포착했는데, 가장 순수한 영웅정신이 (신적 존재나 아카페적 사랑의 부재로) 그로테스크해질 수밖에 없고, 가장 확고한 믿음은 (진리의 비존속성이나 신본주의의 와해로) 광기가 될 수밖에 없으며, 선험적 고향으로 가는 길은 이미 (정신적 고향이나 의지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세계로) 갈 수 없게 되고, 어떠한 현실도 그것이 순수하고 영웅적이라 해도 (신의 부재로 인한 소외나 개인주의 때문에) 주관적 확실성을 뒷받침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줬다. (괄호 안의 소문자는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한 해석임.)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의 인근 대학도시이며 출판업이 성행한 아깔라 데 에나레스에서 외과의사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외과의사라지만 마을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의사여서 평생 구차하게 지냈으며, 세르반테스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의 용모와 성격은 후안 데 하우레기가 그린 초상화와 창작집인『모범 소설집』의 서문에 적혀 있는 내용을 통해 겨우 짐작할 수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매부리코, 기다란 콧수염, 작은 입술을 지녔고, 착한 성품에 진실되고 자비로우며 남을 증오할 줄 모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지식과 교양은 많은 독서롤 통해 쌓여졌다고 하는데, 그가 제도권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다는 추정과 그의 빛나는 어록과의 상반된 차이점을 놓고 볼 때 독학의 비중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세르반테스는 21세 때에 마드리드에서 학교를 경영하던 인문학자이면서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물려받은 오요스에게 배웠다는 자료가 있고, 그때 오요스를 통해 종교비판서 『우신예찬愚神禮讚』의 저자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여러 사상가들의 정신세계와 접한 걸로 추정된다. 영국의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인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감명을 받은 세르반테스는 종교의 자유, 사랑의 자유, 정의로운 재판, 세습제도 폐지를 평생 꿈꿔왔다.

세르반테스가 처음 발표한 문학작품은 시였으며 1568년 10월 오요스가 주관한 왕비(펠리페 2세의 셋째 부인) 추모작품집에 실렸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아름다운 서정성 말고도 아이러니, 유머, 풍자 등 그의 특색이 가미된 시풍을 확립해간다.

이듬해에는 왕의 특사로 마드리드에 주재한 아꾸아비바 추기경의 시종이 되어 이탈리아에 건너가게 되는데, 밀라노 플로렌스, 베네치아, 로마 등지에서 체류하며 이탈리아어와 고전 라틴어를 익히고 고대 로마의 대표적 시인들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의 원전을 탐독하면서 르네상스 문학에도 심취한다.

23세 때인 1570년 나폴리에 주둔중인 스페인 보병대에 입대한 그는(당시 스페인은 이태리 남부를 지배) 이듬해 그의 생애를 뒤바꾼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교황청. 스페인. 베네치아가 신성(神聖)조약을 체결하여 기독교 공동의 적인 오스만 투르크와 대결한 이 전쟁은 서유럽이 거둔 대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첫 승리전으로 기록되며, 이후 터키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이 격전에서 세르반테스는 가슴에 두 발, 왼팔에 한 발의 총상(혹은 언월도로 찔렸다는 설도 있음)을 입어 왼팔 없이 일생을 보내게 되며 ‘레판토의 외팔이’란 별명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오른팔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하여 왼팔을 잃었다.”고 그 명예로운 부상을 평생 자랑으로 여겼으며, 그때의 군생활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세월이라고 훗날 술회한다.

세르반테스는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궁핍 때문에 군복무를 계속하다가 1575년에야 제대하여 나폴리 항에서 ‘태양호’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의 품안에는 왕의 아우인 해군 총사령관과 시칠리아 총독의 추천장이 들어 있었고, 그 중에는 세르반테스의 진급에 관해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항해 6일째 되는 날 프랑스 리용 만 근처에서 터키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동생 로드리고와 함께 아프리카 알제리로 붙잡혀 간다. 거기에서 무려 5년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겪게 되고, 4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더 큰 고난을 겪는다. 33세가 되는 해인 1580년 9월 9일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려고 배에 타고 있을 때 기적적으로 삼위일체회의 수도사들과 알제리에 거주하는 스페인 상인들의 도움으로 몸값을 치르게 되어 무사히 마드리드로 돌아온다.

2년 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군대에 들어가지만 군 출신 실업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인근 톨레도에서 창작에 전념한다. 첫 번째 소설인 『라 갈라테아』를 비롯하여 첫 극작품 『알제리에서의 대우』등을 집필하고, 희극배우의 아내였던 로하스와 교제 중 유일한 혈육인 딸 사아베드라를 얻는다. 하지만 곧 헤어지고, 그의 나이 37세 때 톨레도 근처의 소지주 딸인 19세 팔라시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들은 평생 부부이면서도 세르반테스가 직업상 떠돌이생활을 하는 바람에 헤어져 사는 기간이 더 많았다.

소설 창작만으로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던 그는 무적함대(국왕 펠리페 2세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과 대결전을 각오하고 준비중이던)에 납입할 밀보리 구입계원이 되어 안달루시아 지방을 두루 다니던 중 신부와 싸우고 교회로부터 파문당한다.

세르반테스는 창고의 밀을 무단 매각한 죄로 벌금형을 받았는가 하면, 무적함대의 패배(1588) 이후 그라나다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다시 안달루시아 지방에 가지만 징수한 돈의 예금을 맡았던 세비야의 은행가가 파산 후 도주하는 바람에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세비야 감옥에서 『돈 키호테』를 구상, 일부는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옥 후 바야돌릿에서 딸, 여동생, 질녀 등과 어렵게 지내는 동안 출간된 『돈 키호테』 전편(1605)이 6판을 찍을 만큼 유명세를 타지만 작품 판권을 출판사에 넘겨준 바람에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는 어이없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어느 날 집 앞에서 칼에 찔린 귀족 하나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 치료해주지만 이틀 후에 죽게 되자 투옥되는 불운을 겪는다. 다행히 진실이 밝혀져 며칠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자비로운 마음이 반의적 범죄가 되는 현실을 겪으며 세르반테스가 무엇을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1608년 바야돌릿에서 마드리드로 이주한 세르반테스는 후원자 레모스 백작이 나폴리 총독에 임명되자 동행을 바랐지만 탈락, 창작에 전념한다. 그 후 중.단편 모으집 『모범 소설집』을 출간하여 문단에 정상의 자리를 굳힌 그는 『돈 키호테』의 가짜 후편이 나돌자 68세의 노령을 무릎쓰고 서둘러 『돈 키호테』후편을 완성한다. 전편이 나온 후 10년 만에 출간(1615)된 후편은 삽화가 실린 데다 문학 말고도 인생론과 역사철학론에 관한 논의까지 포함되어 있어 기발한 공상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세르반테스가 죽기 1년 전인 그해에는 『돈 키호테』 후편 말고도 극작품 『8편의 연극과 8편의 막간극들』이 출간된다.

1616년 4월 2일 병으로 쓰러진 세르반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후견인 레모스 백작에게 ‘나는 지금 목숨을 거두오. 다른 세상에서도 당신들을 만나고 싶소.’ 라고 편지를 쓴다. 그리고 4월 23일 조용히 운명한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 우미아델로 수도원에 묻혔다가 칸타나라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장 중에 무덤이 뒤섞여 아쉽게도 그의 무덤은 사라지고 만다.

섹스피어, 몬테뉴 등과 동시대 사람인 그는 공교롭게도 섹스피어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훗날 심심찮은 화제를 남기게 된다.

세계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세르반테스. 그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 작가론적 측면이 부실하고 작품으로만 남게 된 이유도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 생명과 생계의 위협을 받을 만큼 생활이 불안정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반의적 체험이 선량한 그의 정신세계를 독창적으로 개량시키고 착상(着想)에 작용하여 『돈 키호테』와 같은 불멸의 작품을 쓰게 한 것은 운명의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고난을 겪지 않고 순탄한 생을 영위했다면 과연 공상으로 미친 한 인간의 거룩한 불장난에 659명의 등장인물을 동참시키는, 그런 환상적인 플롯이 가능했을지.

세르반테스의 종교관념이 균열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회 부조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황금세기 문학 연구에 전념한 아메리고 카스트로는 <세르반테스의 사상>에서 세르반테스는 가톨릭 교리에 우호적이면서도 인문주의적 입장에서는 종교의 권위주의적(정치적) 모순성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썼다.

유로스타 톨레도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세르반테스가 태어난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를 찾아갔다. 세르반테스의 생가는 옆에 붙은 병원자리가 있어 그 집으로 추정될 뿐이다. 집은 이층 목조로 비교적 규모가 컸다. 집 앞 도로가에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이 철제 벤치에 앉아 있어 두 사람 사이에서 사진들을 찍는다.

생가 일이층에는 당대의 가구와 살림 도구와 유품으로 추정되는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에 나오는 서재의 책상도 눈에 띈다.

생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알깔라의 중심지에 있는 세르반테스 광장을 둘러보고 마드리드로 출발했다. 해질 녘에야 도착한 탓에 식사를 마치고 곧장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은 일찌감치 프라도(PRADO)미술관을 찾아가 스페인 3대 화가인 엘 그레코, 베라스케스, 고야의 그림을 차례로 감상했다. 특히 고야가 궁정화가에서 자연인으로 돌아와서야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그린 <흑백시대>의 그림들이 충격적인 감동을 준다.

프라도 미술관을 나와 유서 깊은 국립 고고학박물관을 찾아갔다. 구석기시대의 원주민에서부터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의 유적과 알타미라 동굴벽화 모형, 로마, 서고트, 이슬람의 문화유산을 감상하고 마요르 광장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젊음이 넘치는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국왕 취임식에서부터 종교의식, 투우, 심지어 교수형까지 집행된 애환이 묻어있는 장소였다.

꼭 다시 가보고 싶던 스페인 광장은 마요르 관장 인근에 있었다. 마드리드의 중심 번화가인 그랑비아와 연결된 광장 중앙에는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 높이 서 있고, 그 아래에 세르반테스의 동상을 비롯하여 로시난테를 탄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산초 판사의 동상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지금 내 서재의 앨범 속에 들어 있는 23년 전의 동상 사진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오랫동안 제자리에 서서 돈 키호테와 산초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갓 금속에 불과한 동상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들은 살 속에 피가 흐르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나는 먼저 돈 키호테와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산초에게 묻는다.

“산초 판사 씨, 당신은 주인님에게 말타고 지나가는 여자를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 공주라고 속였는데, 양심에 찔리지 않았소?”

“찔리기야 찔렸죠. 하지만 나는 주인님이 기뻐하실 걸 생각하면 그런 비양심이 진짜 양심보다 훨씬 값지다고 생각했다오.”

나는 산초의 동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우러러 본다. 사실 산초 판사는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속물적인 인간형에서 돈 키호테적인 숭고한 인간형으로 미끄러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수많은 격언도 대부분이 산초의 입을 통해 나온 민중의 지혜였다.

시민사회의 결과물이며 인간탐구의 장르인 근대소설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세르반테스는『동키호테』를 쓸 때 일반 독자의 정서를 염두에 두고 로망스 문체를 차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작품에는 소설(Novel)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로망스(Romance)라는 전통적인 장르가 혼재하고 있는데 로망스는 세르반테스 시대의 지배적인 서사문학이었다.

꿈이나 공상의 세계를 그리는 로망스는 노드롭 프라이의 말 대로 욕망충족을 실현하는 가장 적합한 문예양식으로, 기사의 충성스런 무용담이나 고귀한 아카페적 사랑이 대부분이며, 주인공으로는 영웅, 기사, 귀족이 주로 설정되었다. 기사소설은 도덕적인 지식 계층의 강력한 비판에 밀려 16세기 중반부터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돈 키호테』의 등장 이후 급격히 소멸되고 만다. 선험적 존재(진정한 신)에 내렸던 뿌리를 잃고 오락적 성격을 띠게 된 기사소설에서 독자는 더 이상 위대한 서사양식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르반테스가 ‘기사소설이 속세에서 갖는 황당한 인기와 권세를 추방하기 위해’ 『돈 키호테』를 썼으면서도 로망스 형식을 취한 것은 대중추수적인 의도 말고도, 기사소설의 패러디 형식을 갖춰야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로망스적 언어유희를 통해 살벌한 검열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절대왕조의 통치하에 있던 스페인 왕국에서 작품을 자유롭게 쓰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소설 『돈 키호테』에서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한 신비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주인공 돈 키호테가 아카페적 사랑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상징적 존재라면 둘시네아는 진리(신)의 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거룩한 사랑의 표상이 된다. 특히 둘시네아는 몰락한 귀족 알론소 키하노가 정의의 투사 돈 키호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는데, 둘시네아가 없다면 돈 키호테의 위대한 모험에서 신비성은 사라지고 만다.

세르반테스가 신비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작품 속의 ‘밤’ 이미지에서도 심증이 간다.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신비체험의 요체를 ‘밤’의 이미지로 표현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돈 키호테가 출정하는 시간은 전편 2번 후편 1번 모두 해가 없는 밤 시간이었다.

페르난도 리엘로는 돈 키호테의 정형성을 논하기 위해 파우스트를 인용하면서 돈 키호테를 신비주의적 인물로, 파우스트를 반신비주의적 인물로 규정했다. 요컨대 그들 두 인물이 추구할 이상세계의 중심에 돈 키호테는 인류를, 파우스트는 자기 자신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돈 키호테의 사랑을 아카페적인 사랑으로, 파우스트의 사랑을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대립시킨 그는 돈 키호테가 영혼의 정화를 체험하고 있다면 파우스트는 지옥의 징벌을 체험한다고 주장한다.

1915년 최남선의 번역으로 <청춘>지에 <돈기호전기頓基浩傳記>로 소개되면서 국내에 처음 알려진『돈 키호테』는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번역되어 현대소설에 다양하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런『돈 키호테』를 일컬어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뵈브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장 냉철하고 깊이 파들어간 ‘인간성의 성서’라고 말했다.

총포의 보급으로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몰락하는 시기에 나온 소설『돈키호테』는 중세의 유럽을 풍미해온 기사소설의 종연을 가져온 완벽한 작품이다. 출간 당시 무척 ‘재미있는’ 소설로만 여겨져 제대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한『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전기(傳記)가 나오고 문학적 연구가 시작되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찬란한 광명천지에 드높이 꽂힌 깃대처럼 우뚝 선다. 낭만주의를 신봉하는 문인들은 이 스페인의 근대소설을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끝없는 대립의 상징으로 해석했으며, 주인공인 돈 키호테를 자유를 실천하는 영웅의 원형으로 받들었다.

자유와 정의와 박애의 실천적 의지에 불타 자기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돌진하는 돈 키호테는 어쩜 오늘날에 꼭 필요한 개혁형 인물인지도 모른다. 요령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치는 우리 현실에(특히 우리 문단 현실에) 가차없이 창을 들이댈 용사. 그런 돈 키호테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소설『돈 키호테』는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어린이들에게는 만화 같은 흥미를 유발시키고, 청소년들에게는 웅혼한 이상세계를 꿈꾸게 하고, 어른들에게는 끊임없는 도전의 역동성을 되찾게 해주는, 모든 세대의 친근한 애용품(?)이 되어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끝)

도스토예프스키와 극점(極點)의 미학

인천공항을 이륙한 러시아 에어로프롯트 여객기는 9시간30분을 날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1시간쯤 대기하다가 곧장 국내선을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모스크바와 함께 특별시로 지정된 페테르부르크는 예술, 문화, 학문의 도시로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인의 의식수준을 고양시키려고 세운 기획도시이다.

페테르부르크에는 밤늦게야 도착했다. 백야(白夜)에 드러난 시가지가 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세련돼 보인다. 폭등한 오일 달러 덕에 경기가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몇몇 귀족의 부귀영화를 위해 대다수 농민이 짐승만도 못하게 살다가, 혁명을 일으켜 황제 니콜라이2세를 처형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체제로 변신하여 미국과 맞겨뤄온 초강대국 러시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여 과학 선진국으로 우뚝 섰으면서 하루아침에(1991) 연방체제가 무너져 14개의 나라가 떨어져나간 러시아.

하지만 러시아에는 그 상처 입은 거인의 정치적 이미지를 경건하게 정화시키는 순결이 녹아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가 늘 내 머리 속을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창녀인 소냐는 바로 순결의 상징인 셈이다. 러시아를 온통 순결로 정화시킨 창녀 소냐. 러시아의 어떤 힘이 귀족의 허위의식을, 공산독재의 시행착오를 일시에 순결이라고 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이미지로 정화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쓴 작품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창녀처럼 무시당하고 싶어. 창녀촌에나 가야 겨우 대접받는 인간. 그래야 세상을 무시할 수 있거든."

작중인물의 말을 통해 표출한 이 아포리즘은 바로 내 서민주의이자 휴머니즘의 색깔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창녀의식은 내 나름의 내용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나보다 더 천하고 못난 게 없으니 그 이상의 내 위상은 모두가 덤이다, 라는 그 내용주의는 어쩜 가장 강력한 자신감인지도 모른다.

선과 악, 진실과 위선, 열등과 자만처럼, 상반된 대극점에 두 발을 디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넘어 환상세계로 도전하려는 극단적인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평생 괴롭힌 간질병마저 지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는데, 발작 직전의 황홀감을 높은 탑의 정점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탐구적인 창작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니체는 그런 도스토예프스키를 일러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심리학자”라 했고, 키릴로프를 짜라투스트라의 원형으로 삼음으로써 『악령』의 작중인물에 불과한 키릴로프를 불후의 인물상으로 남게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문인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메레즈코프스키는 종교적 경향을, 앙드레 지드는 무상진여를, 헤르만 헤세는 아시아적 철학을, 카뮈는 부조리를, 셰스토프는 허무적인 절망의 철학을 캐내어 자기 문학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런 도스토예프스키의 독창성은 루카치의 말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선언했는데 그 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종래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뜻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쿠즈네츠 거리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을 찾아갔다. 십여 년 전에 봤던 허름한 건물은 그대로인데 주변 건물들이 개축되고 있었다. 기념관의 내부도 옛날과 다른 모습이다. 전시실이 말끔히 수리되고 진열품도 다양하게 바뀐 상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발목이 채워진 족쇄가 인상적이다. 무쇠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족쇄를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베리아 유형이 실감난다.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에 가입한 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4월 페트라셰프스키의 집 모임에서 고골리에게 보내질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가 그 ‘사악한’ 편지 내용을 퍼뜨린 죄목으로 체포되는데 평론가 벨린스키는 절대왕정을 옹호한 작가 고골리를 비난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푸리에가 실현시키고자 한 공상적 사회주의란 사랑과 협동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엥겔스가 붙인 이름이다.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집행 현장인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 첫 번째 사형수가 죽고 다음 차례에서 총살되려는 순간 황제의 특사로 강제노동형에 처해져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그해 겨울 트볼리스크에 도착한 그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아내들의 방문을 받았으며, 그 중에는 10루불 자리 지폐를 복음서에 숨겨 건네준 부인도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네 살 때인 1825년 12월 14일 니콜라이1세에게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반란을 도모했던 3000여 명의 근위부대 장교 및 사병의 아내이거나 그들에게 동조한 시민들의 아내이고 보면, 그녀들의 방문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마친 도스토예프스키는 장교로 제대했는데도 사병으로 강등되어 세미팔라친스크에 주둔 중인 제7국경수비대에 편입됨으로써 6년간의 병사생활이 새로 시작된다. 그는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들과 어울리면서 살인범 같은 잔혹한 범죄자도 아름답고 진실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런 체험세계를 『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히 기록한다. 엄혹한 군생활 중에도 창작의 열정을 억누를 수 없던 그는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곤차로프, 칸트, 헤겔 등의 저서를 탐독하며 부지런히 작품을 쓴다. 그가 세무관의 아내이며 학교 교사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사랑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다. 마리야는 이듬해 남편이 죽자 고심 끝에 아들이 딸린 과부의 몸으로 도스토에프스키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서른여덟 살에야 하사관으로 제대한 도스토예프키는 페테르부르크에서의 거주를 허락 받고 10년 만에 시베리아를 떠나지만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훗날 톨스토이가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극찬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출간할 때도 불온한 내용들을 삭제한다는 조건으로 검열 당국의 허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념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러시아에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가 만연했으며 그런 급진적인 사상은 군주제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원형이 된 <무신론자>를 구상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이 터지자 그거에 깊이 빠져든다. ‘네차예프 사건’이란 페트로프스키 농과대학에 재학중인 네차예프가 동창생 5명을 모아 만든 비밀결사조직인 <민중의 복수>가 변절자 이바노프를 암살한 사건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처남이 피해자인 이바노프와 친구 사이여서 그 내막을 소상히 알게 된다.

“나는 놀라운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구상에 불과합니다만 틀림없이 대중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시인 마이코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조된 감정을 잘 드러낸다. 또 훗날 그의 전기를 쓴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가 <악령>에 매달린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이렇게 고심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힘겨운 테마를 택한 듯싶습니다.”

그처럼 『악령』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프 사건’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스타브로긴이라고 하는 매력적이고 전위적인 인물을 설정하는 데에 기제로 작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해낸 여러 인물 중에서도 스타브로긴은 성격구조가 가장 난해한 인물로 그를 이해하면 『악령』을 이해한 거나 진배없다.

부유한 장군 미망인의 외아들로서 명석한 두뇌와 수려한 용모와 강건한 체력을 지닌 청년 스타브로긴은 매력적인 청년이면서도 상식과 젼형을 거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연회장에서 아무 이유 없이 귀족의 코를 잡고 끌고 다닌 안하무인에다, 춤추던 귀부인의 입에 강제로 키스를 퍼붓고 관청에서 자기를 계도하려는 현 지사의 귀를 잘근잘근 깨문 치한이며, 빈민가의 어린 소녀를 겁탈하여 자살하도록 만들고 목매는 모습을 세밀히 관찰한 악마인가 하면, 술김에 내기한 약속 때문에 절름발이에다 광기가 이글거리는 여자와 결혼한 미의식의 반역자인 동시에, 과격한 성격대로 행동하고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며, 화려한 상류사회의 환영을 마다하고 탐욕과 방종이 우글거리는 추악한 빈민굴에 몸을 맡긴 낭인인 데다, 자유주의에 길들어져 인간의 본질적인 과제를 풀려고 몸부림치는 무신론자에, 일상적인 관습이나 도덕규범은 물론 법률까지도 무시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무법자이기도 하다. 그가 자기 집 2층 골방에서 목매달아 죽을 때 사용한 비단끈은 미리 준비한 것으로 거기에는 비누가 잔뜩 칠해져 있었다.

『악령』에는 상징적인 존재 스타브로긴 말고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작품을 통해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키릴로프가 있다. 인신사상(人神思想)의 주창자인 키릴로프는 자기 의지력의 한계를 시험해보려고 환상적인 자살을 결행한 그야말로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처럼 난해한 인물들을 창조해 낸 도스토예프스키의 독특한 문학세계는 그의 예술적인 재능과 도시문화적 취향, 드라마틱한 생애, 그리고 새로운 자유사상의 물결이 도도하게 유입되는 러시아 사회의 현실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선배 작가인 고골리를 흠모하여 “내 문학은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자유로운 환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물을 즐겨 설정했으며, 그런 인물들의 구체적인 형상은 관념이 아닌 주로 현실사회를 통해 모델을 찾았다. 그가 평소 신문을 챙겨 읽어왔고, 모스크바에서 양가집 아들 마주린이 귀금속상을 살해한 사건과 16세의 고등학생(용의자)이 한 가족 6명을 살해한 사건을 『백치』에 적용한 것도 그 한 예라 하겠다.

1865년 첫 번째 장편인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배경 설정을 위해 센나야 광장 쪽을 자주 산책하며 언제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몇 시에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사람들이 언제 귀가하는지를 꼼꼼히 살피고 연쇄살인을 범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취한 군인이 다가와 자신의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를 팔겠다고 하자 그걸 사서 목에 걸고 다녔다. 믿음(러시아 정교회)을 갈구하면서도 그걸 교회 예배 같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 잘됐다싶어 구입한 게 아닌가 싶다. 일상생활에서 뭐가 필요하면서도 선뜻 사러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듯이 그 목걸이는 적극적인 신심(信心)과 소극적인 신앙행위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그 십자가 목걸이에 녹이고 싶었을 것이다.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 같은 신성한 인물을 그리고 있는 데다, 각혈하다 숨을 거둔 아내 마리야와 생전에 겪었던 갈등의 회한, 함께 <시대>지를 발행하며 의지해온 형 미하일과 자기의 문학을 이해해준 친구 그리고로예프의 죽음, 형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바람에 출판업자에게 3000루불을 받고 모든 저작권을 팔아넘겨야 했던 절박한 생활비, 정간된 <시대>지 대신 새로 발간한 <세기>지의 적자운영으로 짊어지게 된 부채, 아내가 죽고 나서 새로 사귄 코발레프스카야 부인의 청혼 거부, 도박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열패감, 점점 심해지는 간질병, 그런 것들은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을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자선 병원 의사인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상인계급 출신의 어머니 마리야 네차예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표도르는 외조부인 표도르 네차예프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으로 외조부는 그의 대부이기도 하다. 13살 때 전원 마을인 다로보예에 머문 그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읽으며 지내다가 형 미하일과 함께 중학과정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들어간다. 그 후 열여섯 살 때 존경하는 푸슈킨이 결투로 숨진 데다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아직 어린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듬해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당시 명문학교인 중앙공병학교에 입학하고, 2년 후에는 하사관으로 임명되어 군생활을 시작하지만 엄격한 규율이 적성에 맞지 않아 외톨이가 된 채 발자크, 호프만, 실러, 위고, 셰익스피어, 괴테 등의 작품을 탐독한다.

18세 때에는 아버지가 다로보예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불운을 겪게 되는데, 애정을 베푼 농노들에게 오히려 생명을 빼앗긴 아버지의 참혹한 모습은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 강한 트라우마(외상)로 작용했고, 훗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인물 설정에서 선과 악(신과 악마)의 모순적 성격구조를 파헤치는 주제항으로 작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물한 살 때 소위로 임관 되어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며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하기도 한다. 스물세 살에 중위로 제대한 그는 처녀작 『가난한 연인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 작품을 이미 등단한 친구 그리고로비치에게 읽어주고, 친구는 즉시 네크라소프에게 보이고, 감동을 받은 네크라소프는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고 감탄하며 다음 날 비평계 거물인 벨린스키에게 보임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호평을 받게 된다.

중년을 훨씬 넘은 가난한 하급관리 마까르와 불행한 소녀 바르바라와의 사랑을 그린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예술가나 도덕주의자의 사랑과 연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를 같이 지은 공범자의 사랑과 연민을 그린 작품이다. 네크라소프가 주간으로 있는 <페테르부르크 문집>에 수록되어 일시에 독서계를 뒤흔들었고, 30년이 지난 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내 생애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라고 술회할 만큼 그의 명성을 담보해준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자만에 빠트렸고, 결국에는 동료들의 비난을 사게 되며 벨린스키와도 거리가 멀어진다.

그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눈이 어두워지고 원고가 밀린 데다 출판업자와 약속한 소설을 제때에 끝내려고 속기사를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가을 어느 날 스무 살 처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가 찾아와 속기를 자청하고 다음날 『노름꾼』부터 구술하기 시작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작품 얼개를 불러주면 안나는 그걸 기록하고 정리해서 다시 확인시켰다. 그들은 그렇게 협조하면서 정이 깊어졌고, 안나와 한 달쯤 지날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디어 청혼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2월 중순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두 달 후에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외국으로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빚쟁이들과 친척들의 등살에서 자유롭고 싶어 떠난 여행이라 4년간 체류하게 된다. 안나가 앞장서 주선한 계획이었다. 그녀는 보석 등 개인 물품을 저당 잡혀 비용의 일부를 남편 가족에게 주고 떠날 만큼 자상한 여자였다.

맨 먼저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이틀 후 드레스텐의 젬퍼미술관에 들러 클로드 로랭의 <아시스와 갈라테아가 있는 해안풍경>과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마돈나>와 한스 주니어의 <그리스도의 주검>을 감상한다. 여기에서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한 도스토예프스키는 특히 로랭의 그림에서 황홀한 이상세계를 느끼고 그 감정을 『악령』에 담는다. 그러는 중에도 도박은 틈틈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유혹했다.

그는 결혼 전에 혼자 유럽을 여행할 때도 룰렛게임에 미쳐 투르게네프에게 돈 날린 사실을 알리고 100달러를 부쳐달라는 편지를 보내 50달러를 받기도 했으며, 심지어 청혼까지 한 지성적인 여성 수슬로바에게도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도박에 미쳐본 사람은 그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돈이 나올만한 지인이라면 어느 누구든 체면 불구하고 손을 내미는 게 노름꾼의 심정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일생을 놓고 볼 때 도박은 그의 간질병만큼이나 두려운 악마였다. 하지만 도박은 그의 생활을 쪼들리게 하고 그의 영혼을 괴롭혔으면서도 그를 타락시키지는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도취적인 체질에 도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해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신비스런 존재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요컨대 도박은 그의 지각능력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광염(狂炎)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그것과는 반대로 몸서리쳐지는 허무나 절망의 공포감에 함몰시키기도 했으며, 그의 병적 심리를 자극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신비로운 절대고독을 느끼게도 했을 것이다. 절대고독에 빠지지 않고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기에 도박에 취해보지 않고는 진정한 황홀경을 맞볼 수 없는 것이다. 절대고독이야 말로 황홀경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관문이니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클로드 로랭이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것도 아내 안나와 일궈놓은 평온한 일상을 도박이라는 악마가 뒤흔든 탓이 아니었을까. 딸처럼 젊고 헌신적인 안나와 동행하는 새 인생의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그래서 일상의 편의주의에 중독 되기 십상일 때, 도박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비성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은 변질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로랭의 <아시스와 갈라테아가 있는 해안풍경>에 취하여 온전히 황홀경에 빠질 수 있었던 것도 활활 타는 도박의 광염과 그것이 남긴 재의 하얀 공포감에 싸여 있어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만약 그가 도박을 쉽게 끊을 수 있는 이성적인 체질이라면 황홀경에 빠질 수도 없으며, 스타브로킨이라는 인물도, 『악령』이란 소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마디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도취적인 체질에 인간의 영혼을 멋대로 조작하는 도박의 조화부림 없이는 『악령』의 형상미(신비성)는 변질되었으리라는 말이다.

1872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민> 지의 편집장을 맡고 정치, 문학, 소설, 일상생활에 관한 글을 <작가일기>에 연재한다. 그는 문단활동에도 참여하여 국제작가회의에서 협회 명예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슬라브 자선협회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한다. 1879년에는 ‘문학기금’을 위한 모금 행사장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일부를 낭독하고, 빅토르 위고의 주재로 열리는 런던 문학회의에 초청을 받는가 하면(건강상 이유로 불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박사논문 심사에도 참여한 적도 있다. 또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서는 슬라브 자선단체 대표로 임명되고, 제막식에 이은 공개회의에서는 투르게네프와 함께 연설을 했는데, 연설 내용은 대중을 열광시킨 푸슈킨에 대한 추앙이었으며, 그때 받은 월계관을 푸슈킨 동상 앞에 바치기도 한다.

60세에 접어든 나이에도 톨스토이의 미망인(백작부인) 집에서 열린 연극 <폭군 이반의 죽음>에서 수도승 역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주일 후 상속 문제로 찾아온 여동생과 다투고 나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각혈한다. 다음 날인 1881년 1월 27일 겨우 각혈이 빤하다가 28일 이른 아침에는 아내에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을 내비치고 복음서를 아무데나 펼쳐 마태복음 3장 14절과 15절을 읽는다. 저녁 7시경에는 자식들을 불러 아들에게 자신의 성서를 건네주고 저녁 8시 40분경에 숨을 거둔다. 그의 시신은 1월 31일 긴 행렬을 이룬 인파의 애도 속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묻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고 몇 년이 지나서 안나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점도 있고 장점도 있었다. 모든 게 다 훌륭하진 않았다. ‘큰 아기’로 봐줘야 할 만큼 어리광스런 점이 많았으며, 까다롭고 제멋대로여서 업무적인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안나는 비범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자상하고 이해심이 깊은 여자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로 밤에만 글을 쓰고 낮 한두 시까지 잠을 잤는데 안나가 어린 자식들에게 아빠의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고 이르는 바람에 애들은 아빠한테 전하고 싶은 말을 메모해서 그 쪽지를 집필실 문틈으로 살며시 디밀어놓곤 했다. 메모 내용은 대개 “아빠 과자 사줘.”처럼 어린이다운 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아직도 “아빠 사랑해요.” 라고 쓴 어린 딸의 귀여운 메모지가 진열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상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안나는 남편이 그림을 보며 멍하니 서 있으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발길을 돌릴 정도로 남편의 정신세계를 존중했다. 그녀는 남편의 도박 빚을 청산하고 생활을 알뜰히 꾸려서 중류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으며, 건강관리에서부터 작품 정리까지 남편의 문학인생을 위해 헌신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아내를 무척 사랑했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아내를 위해 썼으며, 도박으로 집을 날리고 빚을 졌으면서도 죽기 10년 전에는 아내에게 도박을 끊겠다고 약속했다. 안나는 각혈하는 남편이 죽기 2년 전부터는 항상 곁에 붙어 간호할 정도로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넵스키 거리, 궁전다리, 피터요새,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거닐었을 센나야 광장을 찾아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파트에만 들어앉아 가난한 민중의 피를 빠는 전당포 노파를 벌레로 단정한 라스콜리니코프란 인물을 만들어냈는데,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와 전당포 노파를 가까이 배치하여 연쇄살인을 범한 주인공의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쓸 당시에는 러시아에 ‘사회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허용된다’는 허무주의적인 초인사상이 유행했고, 그런 사회 풍조는 중심인물의 성격 구성에 논리성을 제공해준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범인(凡人)과 법을 초월하여 자신이 새로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비범인(非凡人), 즉 ‘모든 것이 허용되는’ 초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초인은 누가 될 수 있느냐? 인류를 위해 필요한 법을 만들고 직접 법을 가차없이 실행하는 자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나포레옹을 예로 든다. 나포레옹은 전쟁 중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지만 살인자로 매도되지 않고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스스로 법을 만들어 집행할 수 있는 비범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예심판사인 포르피리에게 한 말이다.

“보다 더 광범위하게 자주성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면 10만 명에 한 사람 정도 나올까 말까 합니다. 그리고 천재적인 인간이라면 1백만 명에 한 사람 정도일 거고, 위대한 천재 혹은 인류의 완성자는 몇 세기 동안에 생멸한 몇 조(兆) 명의 인간 중에서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할지 모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면에서 푸슈킨이나 레르몬토프가 러시아문학에 접목시킨 유럽 문화, 특히 사회적인 정착지가 없이 자기 확인을 위해 살아가는 <바이런적 인물 Byronic hero>의 후계자랄 수 있겠다. 우울하면서도 동시에 정열적이고, 뼈아프게 참회하면서도 동시에 후회 없이 죄를 저지르는 바이런적 인물인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니체의 초인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급진적인 무신론과 합리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논리에 합당한 결론을 도출해놓고 그것을 행동의 원리로 삼는 인물이다. 그는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소수의 예외적인 인간과, 지배당하고 복종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범인으로 구분했다. 극소수의 초인적인 예외자(지도자)만이 선악의 피안에 있는 것이다. 이미 신은 죽고 없으니 인간이 지상의 유일한 신성이고 입법자이며, 신이 없으니 절대적인 도덕률이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외자인 초인의 확고한 의지만이 그걸 대신할 수 있다. 선과 악도 초인의 판단에 달려 있는데 여기에서 초인의 자질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실천할 수 있는 강인성만이 필수적이다. 때문에 초인에게는 범죄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 비범인이 되어 자신의 이념을 실천에 옮기려고 전당포 노파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살인을 통해 과연 자신이 나포레옹처럼 영웅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추악한 살인자로 전락하는지를 실험하려고 한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천진난만한 백치인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가 살인 현장에 우연히 나타나자 완전범죄를 위해 그녀를 도끼로 찍는다. 그건 파렴치한 살인행위다. 그는 살인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죄책감은 깊어만 간다. 벌레를 죽였노라고 강변할수록 자신이 나포레옹이 아니라 살인마에 불과하다는 자괴심이 들어 치를 떤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벌레에 불과해.... 만약 내가 벌레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찾아올 필요가 없겠지....나는 노파를 죽인 걸까? 아니 나는 나 자신을 죽인 거요. 노파가 아뇨. 나 자신을 영원히 짓이긴 거요.”

이처럼 우주적인 진공으로까지 증폭된 고립감은 그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되었고, 그런 라스콜리니코프를 갱생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아닌, 그들로부터 저주와 욕설을 듣는 창녀 소냐였다.

여기에서 소냐란 인물은 신의 상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앙드레 지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세계를 “이지의 세계와 정렬의 세계, 그리고 이지와 정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바로 미지의 세계인 신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는 창녀 소냐를 통해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녀는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는 법이 정한 형벌의 감내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그가 더럽힌 땅과 모든 인류와 인류를 구한 신에게 용서를 빌고 경찰에 자수하라고 설득한다.

"네거리에 나가 모든 사람에게 절을 하고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당신은 대지에 대해서도 죄를 범한 거에요. 그리고나서 온 세계에 들리도록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 라고 말에요."

그 네거리가 바로 센나야 광장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곳에서 소냐가 시킨 대로 행한다. 부랑아와 술주정뱅이와 창녀가 득실거리던 그 거리에는 지금도 노점상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죄와 벌』은 연재될 당시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유사한 범죄를 일으킬 정도로 폭발적인 선풍을 일으켰으면서도, 신과 양심에 이론적 뒷받침이 거의 없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이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 점을 비난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인간의 심리 묘사에서 극치를 이룬 불멸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나는 문학소년 시절부터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했고 나이 든 지금은 더욱 좋아한다. 같은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는 귀족문화의 허례허식이나 농노제의 비판 등 외면성이 짙은 문제를 다룬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깊은 영혼을 다뤘는데,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사회를 구성한다고 보고 진정한 리얼리즘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유독 진실의 본질에 파고든 작가였다. 그의 문학은 그 누구의 것보다 진실을 향한 뿌리가 굵고 깊다. 천부적인 체질(연민)과 삶의 궤적 탓이다.

진실은 캐야겠다고 해서 캐지는 게 아니다. 진실은 양파다.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는 없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모든 양파를 벗겨봐도 알맹이를 찾지 못한다. 또 알맹이를 캐야겠다는 천착력도 의지력만으로는 강해질 수 없다. 어떤 필연성이 내재된 의지력이어야 한다. 그 필연성이 신앙이다. 사회통념상의 신앙이 아니다.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야 하는, 그렇게 운명지워진 자기 나름의 종교이어야 한다. 그 종교를 만들기 위해 (귀족작가보다 고료를 적게 받은)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병을 앓았고, 도박에 미쳤고, 사형장에서 ‘겨눠 총!’의 종말을 체험해야 했다. (끝)

타나토스와 <폭풍의 언덕>

폭풍에는 마성(魔性) 못잖게 슬픔도 녹아 있다. 악마성과 천사성이 조화를 이룬 바람, 그게 폭풍이다. 황량한 초원에 몰아치는 폭풍의 갈기에서 느껴지는 건 공포감보다 더 진한 비장감이다. 애련하면서도 장엄한 그 감정 속에는 일상이나 상식으로 쉬 지각할 수 없는 초월성이 우글거린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 현장인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로 떠나는 내 마음은 무척 달뜨면서도 엄숙하다.

영국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토록 소망해온 워더링 하이츠 탐방은 그쪽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어긋나곤 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렛포드에 다녀올 때도, 제인 오스틴의 기념관이 있는 초튼에 다녀올 때도, 세계7대 불가사의인 거석 유적지 스톤헨지에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만큼 <폭풍의 언덕> 현장을 찾아가려면 어려움이 많았다. 교통편이 복잡하고 편의시설도 열악한 데다 승용차를 이용하자니 길이 울퉁불퉁하고 주차요금도 턱없이 비싸다. 폭풍이 몰아치는 무어(황무지)의 삭막한 이미지와 히스꽃이 만발하는 초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지방정부의 시책 때문이다. 다른 데 같으면 관광객의 편의가 우선일 텐데 하워드는 원형 보존이 우선이었다.

런던에서 열차를 타고 세 시간 반 가까이 달려 케일리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작은 읍소재지인 하워드(Haworth)역까지는 증기기관차 대신 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하워드에서 워더링 하이츠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걸으며 구경했다. 이처럼 관광이 불편한 곳인 데도 연간 8만 명이 이곳을 찾는데 그들은 모두 슬픔, 장엄, 허무, 죽음, 초월, 증오, 광기, 복수, 애정 등 인간 감정의 극한적인 돌기만을 느껴보고 싶어 찾아오는 모험가들이다.

삭막한 황무지 복판에 버려져 있는 폐옥과 외롭게 서 있는 활엽수를 보고 있노라면 그 경관만으로도『폭풍의 언덕』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광활한 분지에 황혼이 지고, 눈보라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을 상상하면 저절로 가슴이 뛴다.

14세기부터는 톱 위딘스Top withins로, 17세기부터는 위덴스Withens로 불려온 그 삭막한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가 소설의 무대로 삼은 이후부터는 워더링 하이츠로 불려왔다. 아무런 기록도 없고 주변에 농장으로 사용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이 허무러진 페옥은 <폭풍의 언덕>에서 언쇼가(家)의 무대가 됨으로써 세계 문학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리고 스러쉬크로스 그렌지의 린튼가(家)의 무대가 된 폰덴 홀(Ponden Hall)은 1634년 로버트 히튼이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위해 지은 집으로 에밀리가 린튼가의 무대로 설정함으로써 워더링 하이츠와 함께 유적지가 되었다.

상상해 보라! 캄캄한 밤에 번개라도 칠 기미가 보이거나 달빛이 어스름하게 깔릴 무렵이면 캐서린과 히스크리프의 두 유령이 손을 잡고 황무지를 걷는 모습을. 눈보라치는 겨울밤 캐서린의 유령이 창가에 나타나 들여보내 달라고 통곡하던 히스클리프의 집터를.

능선에 구름이 끼고 바람만 스쳐도 분지 어디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인간적인 갈등이 전혀 숨쉴 수 없는 이 낭만어린 황무지에서 스물아홉 살의 병약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음을 1년 앞두고 인간 탐욕의 가장 깊은 극점에 불을 지핀다. 사랑과 증오가 보편성이 전복된 채 황무지에 나뒹굴고 있는데, 그 상처투성이의 애증은 괴기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참혹하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작가가 하인 넬리와 세입자 록우드 두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특이하게 전개시킨 이 작품은 인물의 광기 어린 역동성과 긴박한 묘사가 독자를 긴장시킨다. 또 이 소설은 인간의 정열이 모욕받았을 때 복수와 증오로 이글거리는 사랑의 왜곡을 담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도 히스크리프와의 마지막 이별이 아쉬워 몸부림치다가 실신하는 캐서린의 광기, 복수에 불타는 악마적인 히스크리프의 집념, 원수 히스크리프를 쫓아다니는 힌들리의 파괴적인 잔인성, 그리고 눈보라치는 창가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통곡하는 망령의 애절함은 아무리 허구라 해도 처절하고 박진하다. 다음은 히스클리프가 평생 사랑해온 캐서린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은 말이다.

“캐서린!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 역시 편치 못할 거요. 그대는 내가 그대를 죽였다고 말하였소. 그렇다면 귀신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나 주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자기를 죽인 사람 앞에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고 했소. 어떤 형체로든지 나와 함께 있어 주오!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 주오!”

여기에서 모든 독자들은 눈물을 흘리게 마련이다. 그 눈물은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 흘릴 수밖에 없는 슬픔의 은유이다.

『폭풍의 언덕』은 일종의 통곡의 벽이랄 수 있다. 슬픔과 한이 맺힌 사람들은 히스클리프처럼 몸부림치고 싶어 이곳에 온다. 여기는 유서 깊은 관광지라기보다 실컷 울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통곡의 장소다. 눈물을 흘리고 싶어 비극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듯, 온 세계에서 울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눈물의 성지가 폭풍의 언덕이다.

그처럼 실컷 울다 미치는 것이 구원이다. 히스클리프적인 구원이랄까. 세상사를 잊은 채 캐서린과 합일되기만을 포원하다가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히스클리프의 환희에 찬 죽음.

그렇다. 히스클리프는 그렇게 미치고 싶어한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런 환희는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의 간절한 사랑을 ‘자기를 죽이는 타살’로 의식하듯, 히스클리프도 어떤 초월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 사랑으로는 사랑의 극치를 맛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사랑을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 현실적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의 절대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중심인물을 그런 그로테스크한 성격으로 설정한 에밀리 브론테는 이제 귀신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귀신이 아니면 에밀리는 자기가 그리려 하는 사랑을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된 사랑의 구경적 실체로 설정하려면 현실원칙에 충실한 체질로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작가 에밀리가 죽음의식에 빠져 있었기에 그 설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에밀리가 히스클리프의 울부짖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귀신을 ‘어떤 형체’라고 능청을 떤 것은 귀신의 그런 새로운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려는 소설미학적 장치였다. 다시 말해 귀신을 절대사랑으로 설정한 주관적 미의식과 귀신을 무서운 대상으로 그려야 하는 객관적 서사 사이의 긴장을 이완시키려는 의도적인 장치랄 수 있다.

그럼 에밀리는 어째서 귀신을 절대사랑으로 여길 만큼 죽음의식에 젖어 있었을까? 왜 귀신을 우리처럼 괴기스럽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우선 그녀가 성장해온 환경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어느 여행가는 에밀리 브론테가 살다간 요오크셔 지방의 하워드를 이렇게 묘사했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하워드를 보니 정말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목사관을 둘러싼 하워드의 공동묘지에는 1645년부터 묻히기 시작한 무덤이 4만 개가 넘는다. 그 당시 어린이들은 무덤들이 오염시킨 물을 마시는 바람에 41.6%가 6살 전에 죽었으며 평균 나이가 24살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질병은 발진티푸스, 이질, 천연두, 폐결핵, 홍역, 백일해 등으로 1850년 벤자민 배버즈의 조사로 밝혀졌는데 항시 땅이 축축하고 지저분해서 식수인 건수가 오염에 노출되었다고 한다. 브론테가의 6남매가 단명하게 된 단서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좁은 길을 따라 오르니 언덕 위에 목사관과 교회묘지가 있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세계의 여러 문학관을 답사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내가 에밀리와 『폭풍의 언덕』에 반했다는 말이다.

야트막한 담이 쳐져 있는 목사관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벽에 붙은 샬롯, 에밀리, 앤, 세 자매의 초상화가 나를 반긴다. 1834년 경에 오빠 브랜웰이 그린 그 초상화는 4쪽으로 접혀진 자국이 선명하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반가운 그림이었다. 화가 지망생인 브랜웰은 술과 아편에 중독된 무절제한 생활로 이미 폐인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앤이 가정교사로 있던 집 부인에게 실연을 당한 후에는 완전히 생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폭풍의 언덕>에서 힌들리의 파괴적인 성격유형은 에밀리가 오빠의 성격을 모방한 게 아닌가 싶다. 에밀리는 유독 오빠를 따랐던 것이다.

이층에 올라가니 창 밖에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진다. 하지만 시선을 좁히면 온통 주위가 무덤뿐이다. 남쪽을 향한 에밀리의 방에서는 공동묘지의 즐비한 무덤들과 무덤 끝자락에 있는 교회가 한눈에 굽어보였다. 목사관은 죽음에 갇힌 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눈만 뜨면 무덤이고 잠도 무덤 한복판에서 자는 셈이었다. 브론테 자매는 죽음의식이 충만한 이끼 긴 묘비들을 보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매는 주민들의 죽음을 수없이 체험했다. 아버지가 주민들의 매장을 집전하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워더링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귀에 익숙한 폭풍소리, 그 폭풍에 쓸려 한쪽 방향으로만 휘어버린 괴기스런 나뭇가지들, 음산한 황무지의 달빛, 묘비의 형체와 그림자, 무수히 봐왔을 관, 매장되는 시신, 검은 상복, 흐느낌소리와 눈물, 축축한 땅 등은 모두가 에밀리의 의식세계에 육화되었던 것이다.

에밀리에게 있어 죽음은 신성하고 친숙하고 아름다운 형태였다. 그녀는 자기가 쓴 190여 편의 시 속에서 죽음이란 단어가 사랑과 생명 다음일 정도로 빈번히 나온다. 오죽해야 히스클리프의 입을 빌어 “내게는 죽음과 지옥뿐”이라고 말했을까. 에밀리가 느끼고 인식한 죽음은 이물없고 친숙하며, 추상이 아닌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이었다. 무덤들이 즐비한 묘역은 무섬기가 서려있는 월하(月下)의 공동묘지가 아니라 집안에 있는 마당이나 즐겁게 뛰노는 놀이터에 불과했다. 이끼 낀 묘비도 한갓 정원석일 뿐이다. 에밀리가 공동묘지에서 느낀 감정은 우리가 성장기에 체험한 공동묘지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공동묘지를 외딴 산협 속에 숨겨둠으로써 공동묘지를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될 무섬기의 원흉으로 터부시해왔지만 에밀리가 체험한 공동묘지는 마당가의 정원처럼 만지고 거닐고 늘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자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를 열어주는 사색의 공간이었다.

공동묘지에 우글거릴 귀신도 우리가 느끼는 그런 섬뜩한 존재가 아니었다. 에밀리는 영혼불멸을 믿었다. 그녀는 육체의 소멸인 죽음이 오히려 두 영혼의 합일을 정당화시킨다고 믿었다. 별개의 몸으로 구분된 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두 육체는 영혼합일의 방해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귀신은 육신만 제거된, 영혼합일이 가능한 다른 형태의 순결한 영혼일 뿐이었다.

에밀리는 자매들 중에서도 가장 하워드의 황무지를 좋아했다. 세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움에 묻힌 그녀로서는 자연과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꽃으로 뒤덮인 벌판과 아득히 뻗은 능선에서는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은 순결한 환상이 느껴졌을 테고,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장엄한 황야와 거침없이 들판을 휩쓰는 폭풍은 그녀에게 자유에의 동경과 웅혼한 기개와 인습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자유감을 느끼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샬롯 브론테는 동생 에밀리를 일컬어 “남성보다 강하고 어린 아이보다 순진하며, 황야의 젖을 먹고 황야의 자유를 숨쉬었던 황야의 인간”이라고 했지만 끝간데없는 벌판과 청청한 하늘 사이의 삭막한 무한공간에서 에밀리가 느낄 수 있는 세계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비장감을 충동하는 광활한 황무지와 존재의 본질을 묻는 음산한 공동묘지가 그녀의 체질을 담대하게 형성했을 거라는 말이다.

『폭풍의 언덕』을 요약하자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언쇼는 어느날 리버플에 갔다가 버려진 집시 아이 하나를 데려와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친아들처럼 키운다.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친한 사이가 되지만 아들 힌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증오하게 된다.

언쇼가 죽자 도시에서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하인처럼 부릴 뿐만 아니라 동생 캐서린과의 사이를 떼어놓으려 애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애정은 더욱 깊어만 진다. 그러던 어느 날 힌들리의 구박을 피해 황야로 뛰쳐나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그 지방 치안판사이자 대지주인 린튼의 저택 스러쉬크로스 그렌지를 들여다보다가 캐서린이 그 집 개에게 물려 5주간 치료를 받게 되고 히스클리프는 집시로 취급되어 문전박대를 당한다.

린튼가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캐서린이 그 집 아들 에드가의 사랑을 받게 되자 히스클리프와 에드가의 감정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고민에 쌓인 캐서린은 하인 넬리에게 속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사회적인 신분 차이가 걱정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연히 그 말을 엿듣게 된 히스클리프는 절망을 안고 곧장 하이츠를 떠난다. 캐서린이 찾아보았지만 히스클리프의 행방은 묘연했다. 캐서린은 3년 후 에드가와 결혼하게 되는데 히스클리프가 하이츠로 돌아온 것은 그 무렵이다. 행방불명된 지 3년 만에 돈을 벌어 하이츠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잔혹한 복수극을 펼치기 시작한다. 복수의 대상은 우선 언쇼가의 힌들리를 파멸시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린튼가의 에드가를 망치는 일이었다.

히스클리프는 먼저 에드가의 여동생인 이사벨라에게 접근하여 결혼하기에 이르지만 그녀는 한갓 학대의 대상일 뿐이었다. 히스클리프가 여전히 캐서린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하인 넬리는 히스클리프의 간청을 들어주어 캐서린을 만나도록 주선해주고, 두 남녀는 오열 속에 포옹한다.

그들의 애정이 깊어질수록 에드가와 히스클리프 사이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어느날 캐서린은 남편 에드가와 히스클리프가 심하게 다투는 꼴을 보고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캐서린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그럴수록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에 대한 애정은 광기로 치닫는다. 건강이 악화된 캐서린은 결국 딸 캐시를 낳다가 죽고 마는데, 그후 캐서린의 연혼만을 부르며 미쳐 지낸 히스클리프가 죽자 주민들은 밤에 두 연인의 유령이 다정하게 벌판을 거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폭풍의 언덕』에서 스토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히스크리프의 복수방법이다. 즉 언쇼가와 린든가의 재산을 모두 독차지하는 것이 복수의 스토리랄 수 있으며, 여기에서 재산법이나 상속법에 대하여 폭 넓은 공부가 필요했다. 히스크리프가 두 집안의 재산을 독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은 18세기 말엽 영국의 실제 상속법이나 유언법에 부합되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사회경험이 적은 에밀리가 과연 의도적인 구성력으로 이 작품을 썼을지 의심하는 평자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언니 샤롯 브론테는 에밀리가 거친 정서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히스크리프라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짓(창작)을 저질렀다고 주장함으로써 평단을 잠재우고 만다. 샬롯은『폭풍의 언덕』 개정판 서문에서 동생 에밀리를 “남자보다 더 강하고 아이보다 더 단순하게 그녀는 홀로 섰다.”고도 평했다.

20세기에 들어 『폭풍의 언덕』에 대한 새로운 비평이 대두되면서 로맨스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 말고도 사실주의적 요소에도 관심이 쏠렸는데 창작 당시의 사회학적 견해가 그것이다. 『폭풍의 언덕』이 출간된 1847년 무렵은 영국 수상을 지낸 디스렐리가 그의 소설 『시빌sybil』에서 밝혔듯, 자본계급과 노동계급, 공장주와 임금노동자처럼 부자와 빈자가 뚜렷이 갈라진 시대였고, 산업혁명의 정착으로 자본주의적인 생활패턴이 부러움을 사는 시기였다. 에밀리는 아버지가 굶주리는 노동자들을 돕다가 고용주들의 분노를 사는 모습을 목격했고, 차티스트 운동의 거점인 할리팩스에서 6개월 동안 교사 생활한 적도 있어 격동의 사회상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첨예한 갈등구조에서 히스크르프를 억압받는 노동자의 전형으로 해석한 평자의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밀리를 공상의 세계에 묻혀 지낸 고독한 천재로만 보는 것은 편파적인 관점일지도 모른다. 에밀리가 근원적인 존재론에 파고들었기에 사회 현실차원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겠지만 사회환경적 정황으로 보면 에밀리의 숨겨진 다른 내면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사실주의적 요소는 어두운 정열의 세계를 그린 에밀리의 의식세계에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 7월 30일 영국 요크셔 주의 솔톤에서 목사인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와 문학적 재능이 풍부한 어머니 마리아 브란웰 사이에서 1남 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 때 아버지가 하워드 교구목사가 되자 그곳 목사관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게 된다. 1824년 랭커셔 주의 사립 기숙학교인 코언 브리지에 입학한 에밀리는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롯과 함께 기거했는데, 이 학교는 훗날 샬롯이 쓴 『제인에어』에 등장하는 로우드 기숙학교의 배경이 된다. 에밀리는 부모한테서는 침울하면서도 정열적이고 기지가 풍부한 아일랜드적 기질을 물려받았고, 그녀가 성장한 하워드에서는 절도 있고 과묵한 요오크셔 지방의 기질을 체득했다.

브론테 자매들은 어머니가 죽자 이모인 엘리자베스 브란웰의 보호를 받으며 독자적으로 학문을 익히고 글을 썼는데 에밀리는 어려서부터 상상 속에 빠지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여덟 살 때 언니 샬롯, 동생 앤, 오빠 브랜웰과 함께 아프리카 해변에 글라스타운 왕국이라는 가공의 나라를 세우고, 각가지 모험담을 산문과 시로 엮어 그 나라의 신문과 잡지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에밀리는 나중에 동생 앤과 함께 북태평양상에 <곤달>이라는 상상의 섬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무대로 곤달 왕국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때 발표한 『곤달의 시』는 『폭풍의 언덕』의 원형이라 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병약질로 태어난 에밀리는 하워드의 황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책을 벗삼고 상상의 왕국을 지키며 시를 썼다. 하지만 시는 그저 쓰고 싶어서 썼을 뿐이어서 샬롯이 우연히 동생의 시를 읽고 그 박력과 독창성에 감탄하여 발표할 것을 권했을 때 에밀리는 몹시 화를 냈다. 결국 샬롯의 설득에 못이겨 세 자매는 1846년에 런던에서 익명으로 『커러와 엘리스와 액튼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했지만 50파운드의 비용이 든 이 시집은 겨우 2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폐결핵 환자였던 에밀리는 오빠 브랜웰의 죽음 때문에 더 단명하게 된다. 오빠가 1848년 9월에 죽자 에밀리는 오빠의 죽음에서 받은 심리적 타격과 장례 때의 무리로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19일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의사의 내진이나 복약은 물론 침대에 눕는 것마저 거부하다가 끝내 소파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세계문학에는 각가지 사랑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많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크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만큼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뒤틀린 사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버트란트 러셀이 에밀리 브론테에게서 어떤 비장한 영웅성을 떠올린 반면 언니인 샬롯 브론테에게서는 가정교사의 왜소함이 느껴진다고 말했지만, 에밀리의 오빠 브랜웰이 그렸다는 자매의 초상화 중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서는 엄숙하고 황량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비극미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특성 역시 『폭풍의 언덕』에 그대로 육화되어 있다.

에밀리의 작품은 출간 당시에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샬롯의 소설 『제인에어』가 대성공을 거두자 에밀리와 앤의 작품도 덩달아 관심을 끌었지만 세인의 주목을 받진 못했다. 오늘날 세계문학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에밀리의 소설이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서머세트 모음이 『폭풍의 언덕』을 세계 10대 명작에 넣었던 것이다.

모음은 『폭풍의 언덕』의 문체와 구성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그 소설을 엘 그레코의 그림에 비유하며 이상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모음의 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샬롯과 에밀리 두 자매의 성욕에 대한 거론이다.

그는 말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왜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실적인 연인이 안 되었는지 그게 이상하다고. 그리고 에밀리는 간통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터부시했고 성교 자체를 혐오했는지 모르지만 브론테 자매는 둘 다 성욕이 강했을 거라고.

모음의 그 말에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젊은 에밀리가 어째서 육체적 결합을 멀리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싶은 견해는 그들을 키워준 이모 엘리자베스 브란웰이 자신의 아버지인 형부와 평생 한 집에서 지내왔다는 사실이다. 기록은 없어도 형부와 처제가 외로운 환경 속에서 평생을 지내왔는데 예민한 에밀리의 감각에 포착된 결정적인 장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폭풍을 좋아한다. 폭풍에 몸을 맡기면 팽팽한 욕망이 재가 되고, 그때 나는 가장 조용한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폭풍을 좋아하는 체질은 잘 먹고 잘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요함만이 그리울 뿐이다.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는 일상의 고요가 아니다. 비평가 세실(David Cecil)은 폭풍과 고요가 공존함으로써 우주의 조화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그는 폭풍과 고요의 두 원리에 격정적인 언쇼家(워더링 하이츠)와 교양 있는 린든家(스러쉬크로스 그렌지) 두 집안을 대입시키고, 마치 조화로운 세계에 악마가 끼어들 듯 히스크리프란 친입자로 하여금 우주를 파괴시켰다가 두 집안의 후손인 헤어튼과 캐시의 행복한 결합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다시 이룬다고 했다.

에밀리 브론테가 죽은 지 160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히스클리프나 캐서린의 유령처럼 황무지 어디쯤에 유령으로 존재할 것이다. 자신을 신비한 세계로 끌고감으로써 히스크리프의 악마적인 야수성을 창조해낸 에밀리. 삭막한 황무지로 에둘러진 공동묘지 한 복판에서 허무를 안고 외롭게 성장한 에밀리. 폐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으면서도 문학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기다가 30세의 처녀로 생을 마감한 에밀리. 나는 그녀의 유령을 만나기 위해 브론테 다리를 건넜고, 브론테 폭포수에 손을 적셨고, 폭풍의 언덕을 거닐었다. 그때 나는 분명 보았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면서 언덕을 휩쓸며 지나가는 억센 바람결을.

나는 그 바람을 쐬러 하워드에 또 가야한다. 갈 것이다. 가능하다면 거기서 죽고 싶다. (끝)

산티아고의 비의적(秘意的) 승리

1961년 7월 2일 아침, 아이다호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한 헤밍웨이의 종연에 대하여 당시 대통령인 케네디는 다음과 같은 애도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세계적인 위대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국민의 정서와 태도에 미국민 누구도 따르기 힘든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거성처럼 문학계에 출현한 이후,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주창자로서 이 세대를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으며,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문학은 물론 인간의 사고방식을 변형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작가이다. 오늘날 미국은 예술의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비록 그는 전 세계를 무대 삼아 위대한 세계시민으로 살아왔지만, 그가 명성을 떨치며 자신의 예술을 창조해낸 바로 그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을 시작하였듯이 그 종지부도 미국에서 찍고 말았다.”

대통령 출마 전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을 낸 케네디는 용감하고 떳떳한 정치가이기에 헤밍웨이 같은 작가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1962년, 세계3차대전(핵전쟁)으로까지 비화될 뻔한 ‘쿠바 위기’ 때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과 맞서 해상 분쇄를 단행한 케네디의 용기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헤밍웨이가 사망한 이듬해, 그의 동생 레스터는 전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의 형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폭력적인 죽음의 방법을 선택했으나 그의 삶의 방법도 폭력적이었다."

여기에서 폭력이란 말은 용기의 은유랄 수 있다. 자살을 용기라고 표현할 수 없어 그처럼 폭력이란 단어를 차용했을 뿐인데, 사실 헤밍웨이의 용기는 사전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단어이다. 그의 용기는 허무에 뿌리를 둔 용기여서 성취를 전제한 용기가 아니고 자신을 버리는 용기이며 그래서 고독한 용기이기도 하다. 1차세계대전 참전, 스페인 내전 개입, 2차세계대전 종군 등 그의 모험적인 생은 삶의 애착보다도 자기 삶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주어진 생을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고 방목시켰다라고나 할까, 그런 투기(投棄)가 진정한 용기가 아닐는지. 때문에 헤밍웨이는 진실된 인간형일 수밖에 없고, 자살이 그 진실의 원형이랄 수 있겠다.

5일 동안 캐나다 록키산맥 횡단을 마치고 시카고로 들어오면서 나는 헤밍웨이의 용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 보았다. 8년 전 아프리카 케냐를 여행할 때도 나는 암보셀리의 평원에서서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며 그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항상 죽음의식을 안고 극단적인 정(淨)의 세계와 극단적인 동(動)의 세계를 체험해온 나로서는 그의 용기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가로수가 우거진 시카고 교외의 생가 주변은 그의 격정적인 삶과는 대조적으로 가을볕이 한가롭게 깔려 있다. 기념관으로 꾸며진 생가는 내부가 깔끔하면서도 포근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서가 위에 걸려 있는 부모의 사진 중에서 아버지 사진에 먼저 눈이 간다. 열 살짜리 어린 자식에게 엽총을 사준 아버지가 아닌가. 한국의 아버지로서는 상식의 영역을 넘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뭄에 메마른 저수지에서 붕어를 잡아왔다가 익사사고를 걱정한 아버지한테 작대기 찜을 당한 적이 있다. 총기사고의 걱정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에게 엽총을 사준 헤밍웨이 아버지의 그 유별난 자식사랑이 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시카고 생가를 찾고 보니 헤밍웨이가 낚시, 사냥, 권투 같은 거친 스포츠에 몰두하며 야성적인 삶을 즐긴 키 웨스트가 떠오른다.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 반도 끝에 있는 산호섬의

키 웨스트에는 헤밍웨이가 1931년에 구입하여 십년 넘게 살아온 스페인 풍의 아름다운 집이 있는데 『무기여 잘 있거라』등 그의 대표작들이 그 집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키 웨스트는 낚싯배 파일러를 타고 멕시코만을 휘저었던 헤밍웨이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며, 그의 단골 바인 ‘캡틴 토니스’와 생음악 주점인 ‘슬로피 조스’가 있어 지금도 헤밍웨이를 기리는 문학애호가들의 발길이 번다한 곳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궤적을 살피자면 쿠바를 빼놓을 수 없다. 머잖아 그곳도 답사할 계획이지만 아바나에는 헤밍웨이의 유품 일부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어 요즘은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카스트로 정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궁금하다.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남긴 업적은 작품 말고도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와 '하드보일드 문체(Hard-Boiled Style)'가 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낀 세대, 20년대 미국에 팽배해 있던 물질만능주의(특히 자동차 산업)에 식상한 세대로, 그들은 전쟁 후에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서 방황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러진 이름이다. 독가스까지 살포하는 비열한 전쟁을 목격하고 인간회의에 빠진 그들은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 등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욕구가 분출했던 것이다.

하드보일드 문체는 헤밍웨이의 독특한 문체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올리는 기법으로서 주로 비정, 냉혹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헤밍웨이는 고교 졸업 직후에 7개월 동안 근무했던 <캔사스시티 스타>지에서 엄격한 문체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문체 수업이 후일 헤밍웨이로 하여금 그의 간결문체를 유명한 문체로 부각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은 입사 당시의 기자수첩에 적힌 아주 흥미로운 주의사항인데, 이런 메모로 보아 하드보일드 문체는 원래 신문기사 문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짧은 문장을 사용하라. 패러그래프(첫문장)을 짧게 하라. 강력한 미어(美語)를 구사하라. 긍정형의 문장을 사용하라. 부정형은 금물이다. 낡은 속어는 사용하지 말고. 속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신선한 어휘를 선택하라. 되도록 형용사를 쓰지 말고, 특히 ‘웅장한’ ‘화려한’ ‘원대한’ 따위의 극단적인 형용사를 피하라.”

헤밍웨이는 1899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교외인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즈는 오크파크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낚시, 수렵 등 스포츠를 즐긴 멋쟁이었고 어머니 그레이스 호울은 신앙심이 깊고 음악을 애호한 사교적인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가 3살 때에 이미 낚시 도구를, 10살 때에는 엽총을 사주어 원시림지대를 마음껏 누비게 했으며, 어머니는 그에게 첼로를 사주어 매일 1시간씩 연습을 시켰다. 첼로 대신 엽총을 택했지만 그처럼 부모의 상반된 정서는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야성적인 스포츠를 즐기면서도 댄스파티에 끼지 않을 만큼 고독을 즐기기도 한, 양극화된 성격구조를 형성시킨다. 14살 때 권투선수까지 경험해본 그는 고교생이 되자 문학에 흥미를 갖고 학교 주간지의 편집도 맡아보고 집필에도 열중하지만 두 번이나 가출할 만큼 청소년 나름의 심리적 갈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 해인 1917년 봄에는 고교 졸업을 앞둔 시기인데도 자원입대를 열망한다. 전사를 걱정한 아버지의 반대로 입대가 좌절되자, 그는 반항하는 뜻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과 동시에 큰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캔사스시티 스타>지의 기자가 된다.

19세가 되는 1918년 4월에야 헤밍웨이는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적십자사 앰뷸런스 운전사가 되어 소망해온 군생활을 시작한다. 북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무공훈장까지 받는데, 밀라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미국인 간호사 그로스키와 열애에 빠진다. 품행이 우아하면서도 밝은 성품인 그녀는 헤밍웨이를 사랑은 하되 연하의 남자인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진 못한다. 술로 마음을 달래야 했던 헤밍웨이는 그 사랑을 나중에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격정적으로 그린다.

제대 후 귀국하여 작가 셔우드 앤더슨을 만나면서 문학인생을 작심한 헤밍웨이는 1921년 첫 부인인 해들리 리차드슨과 연애결혼하고, 카나다의 <토론토 스타 위클리>지의 해외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떠난다. 앤더슨의 소개로 파리에서 미국의 여류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알게 된 헤밍웨이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 『율리시즈』의 저자 제임즈 조이스 등과도 친분을 맺었으며, 그들로부터 반복과 이미지즘과 의식의 흐름 등을 습득하고 그것을 소설에 적용한다. 그중 파리그룹의 중심인물인 거투르드 스타인과 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문학에 직접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특히 스타인 여사는 훼밍웨이의 문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녀는 프래그머티즘을 신봉한 윌리엄 제임스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모더니즘 작가로, '길 잃은 세대'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헤밍웨이는 그녀를 비롯하여 앤더슨, 파운드 등 선배 문인들의 영향과 충고를 받아들여 하드보일드 문체를 발전시킨다. 헤밍웨이가 단편과 시를 처음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26에 출간되어 헤밍웨이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장편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는 1차세계대전 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길 잃은 세대와 하드보일드 문체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다. 파리 특파원 생활, 영국 미국 작가들과의 교류, 보헤미안들과의 교제 등 그의 체험적 요소가 다분히 녹아 있는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는 환멸과 절망으로 얼룩진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인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헤밍웨이는 이 장편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 모든 사랑은 결국 섹스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했고,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관심사라고 역설했다.

이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전통가치에 환멸을 느끼는 비극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으며 희망 없이 방황하는 세대이다. 그리고 작품의 문체에서도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어휘와 단어를 사용했고, 묘사와 서술에서도 형용사 같은 수식어를 절제했다. 특히 치밀한 객관적 상황묘사를 통해 인물의 개성과 생동감 넘치는 현장성을 살려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전쟁문학의 백미로 평가 받는 <무기여 잘 있거라> 역시 고전적 비련의 애정 스토리 이면에는 현대 젊은이들의 방황이 묻어 있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인생이란 모닥불의 통나무 위에 모인 개미떼의 아우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헤밍웨이가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변자로 인식된 것도 그런 인상적 발언 때문이다. 주인공 프레드릭 헨리 중위는 전쟁의 허위의식을 이런 말로 표현한다.

“나는 신성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영광스럽다는 것에 영광은 없었다. 그리고 희생이란 마치 시카고 가축 수용장과 같았을 뿐이다. 고기는 파묻을 도리밖에 없었지만.”

헨리의 고백형식으로 쓰여진 장편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전쟁과 죽음의 현장에서 피어난 비련의 사랑을 그린 걸작으로, 미국 청년이면서 이탈리아군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프레드릭 헨리 중위와 영국 처녀이면서 이탈리아군의 간호사로 복무하는 캐서린 버클레이와의 격정적인 사랑은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유되고 있다. 작가의 체험적 요소가 다분한 이 작품에서도 헤밍웨이는 남녀 두 주인공을 자원(自願)해서 군인이 되고 간호사가 된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연대의식을 자연스레 살려내고 있으며, 묘사에서도 하드보일드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허무적 분위기를 오히려 아름답게 살려내고 있다.

경제공항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하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동반자문학이 성행하던 30년대에는 헤밍웨이 역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같은 사회현실이 반영된 작품을 썼지만 곧 자신의 창작패턴을 찾게 된다.

1934년, 아프리카 사냥 여행에서 돌아온 헤밍웨이는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을 에스콰이어지에 발표하는데, 미국문학에서 고전(古典)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40년에 출간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헤밍웨이의 4번째 장편소설로 베스트셀러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38세 때인 1937년 <나나>지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란에 종군하여, 보수적인 프랑코 반란군과 싸우는 인민전선 정부군을 돕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그 당시 헤밍웨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인간조건』의 저자인 앙드레 말로와 내란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약속하고 말로는 『희망』을,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다. 약 1년 반에 걸쳐 완성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2차대전 중 군대에서 게릴라작전의 교과서로 사용할 만큼 작전 묘사가 치밀하여 쿠바의 카스트로도 이 작품을 탐독했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대표작들은 거의가 영화화 되었다. 내가 헤밍웨이 원작의 영화를 본 것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비롯하여 『무기여 잘 있거라』,『킬리만자로의 눈』,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노인과 바다』 등 5편이며, 그 중에서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작품은 샘 우드가 감독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로버트 죠단 역의 게리 쿠퍼와 마리아 역을 맡은 잉그리트 버그만의 눈빛과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고전 서부극 <하이눈>에서 반해버린 게리 쿠퍼의 비정하면서도 정의로운 이미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온전히 각인되었던 것이다.

미국 청년으로 몬타나대학의 스페인어 강사인 로버트 죠단은 1년간 휴가를 얻어 스페인 내란에 참가한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인 그는 파시즘과 싸우는 정부군의 일원이 되어 다이나마이트 폭파 작업에 종사하다가, 적의 진격로인 철교 폭파 업무를 띠고 집시 두목 파블로가 이끄는 게릴라에 섞여 현장에 침투한다. 작전기간은 겨우 3박4일. 죠단은 치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미모의 스페인 처녀 마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마리아는 파시스트에게 부모를 잃고 자신마저 폭행을 당한 데다 머리까지 삭발당한 여자였다.

폭파 업무는 파블로의 배신과 시행착오로 위기를 겪으면서도 결국 성공한다. 이제 철수가 문제였다. 아군의 퇴로에는 적군의 사격에 노출된 지형이 있었던 것이다. 엄호사격을 해줘야 겨우 빠져날 수 있는 외길이었다. 죠단은 대원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맨 나중에 말을 몰고 달리다가 총탄을 맞는다. 그는 피를 흘리며 겨우 대원과 합류하지만 남은 생명을 대원들과 사랑하는 마리아의 안전 퇴각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죠단의 영웅적 행위는 인류에 대한 그의 연대의식과 희생정신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자유민들을 위한 싸움이라고 믿는 그의 희생정신은 스페인내란 참여가 국지적인 참전 의미를 초월하는, 인류애적 항전임을 보여준다. 죠단은 말한다. “나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하여 싸웠다. 만일 우리들이 이곳에서 이기면 모든 곳에서 이기는 것과 같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제목 역시 그런 연대의식을 내포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영국의 종교시인 던(John Donne)의 산문시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는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은 울리나』이다.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누구의 죽음도 내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작품이어서 비미국적인 작품이랄 수 있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문학적 업적은 1차세계대전 이후 불어닥친 모더니즘과 그 모더니즘의 미국적 수용에 있다 하겠다. 길 잃은 세대는 모더니즘의 미국판 이야기랄 수 있을 정도로 훼밍웨이의 소설 분위기는 T.S. 엘리엇의 『황무지』와 유사하다.

하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헤밍웨이는 인간긍정의 자세로 돌아서게 된다.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환멸과 허무에 초점이 맞춰졌던 그전의 작품과는 달리 후기 작품들은 상호 유대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시련과 고통을 넘어서려는 극복의지에 초점이 모아진다. 요컨대 엄격한 극기와 인내와 의지력으로 순리를 찾으려는 스토이시즘을 엿볼 수 있는데, 1952년 <라이프>지에 발표한 중편 『노인과 바다』에 그 진수가 녹아 있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에는 헤밍웨이의 본질적인 정신구조가 더 깊이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헤밍웨이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고 그 명성의 연결선상에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케 한 『노인과 바다』는 그 만한 무게의 주제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노구를 무릅쓰고 먼 바다로 나가 대어를 낚지만 상어 떼를 만나 고기는 뼈대만 남게 된다. 그래도 노인은 최선을 다했기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어구를 손질한다. 인간의 가장 순결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산티아고의 입을 빌어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라고 외친다. 그 말은 오랜 세월 허무와 싸워온 헤밍웨이 식의 육체적 아포리즘, 즉 실천적 용기로 허무를 극복하려 한 헤밍웨이 식의 언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노인과 바다>이고,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헤밍웨이 정신의 상관물이며, 그가 낚은 대어는 그가 노려온 욕망이다.

이제 『노인과 바다』의 골격은 드러난 셈이다. 산티아고 노인의 낚싯배에 매인 채 항구로 끌려오는 도중 상어에게 육탈당한 대어 티부론의 앙상한 뼈는 현실적으로는 패배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의적(秘意的) 승리의 상징이랄 수 있다. 여기에서 비의란 신의 은총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시도하려는 용기를 말하는데, 신의 영역에 도전할만한 그런 용기가 아니고는 허무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패배나 승리를 사전적으로만 정의할 수 없거니와 패배와 승리의 개념도 일반적 해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산티아고가 자신이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모두 육탈당하고도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간 것도 그가 고기의 육탈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온전한 고기로 남아있건 뼈대만 남아있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대어를 낚은 것(허무극복)에만 의미가 주어질 뿐이다.

“이놈, 네가 나를 죽일 작정이구나. 노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겠지. 그런데 이 친구야, 나는 지금까지 너처럼 거대하고, 너처럼 아름답고, 그리고 너처럼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처음 봤구나. 자, 그럼 이리 와 나를 죽여다오. 어느 편이 나를 죽이든 그건 알 바 아니다.”

이 부분은 노인 산티아고가 체험한 일종의 절대환희라고 볼 수 있다. 환희는 욕망이 해소되는 순간 분출한다. 죽음의 의미상실, 즉 허무극복보다 더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욕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때문에 그런 환희는 모든 생의 가치와 도전을 녹여버린다. 모든 게 시시한 것이다. 정복된 것은 시시해지게 마련이어서 ‘내 멋대로’ 분식할 수 있다. 그 무섭고 괴팍하고 캄캄했던 적(허무)을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결한 친구로 꾸밀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양보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내 멋대로 조정할 수 있는 나의 피조물이나 진배없으니 앞세울 수도 있고 뒤세울 수도 있다. 허무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래서 “이리 와 나를 죽여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평생 고심해온 주제는 전쟁이나 투우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고통과 죽음과 허무 등 비극적인 운명과 맞선 개인의 패배, 그리고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철학적 성찰이었으며, 본인의 삶 또한 그런 작가주제를 능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실천과 독특한 문학적 표현 장치를 동원해 전경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헤밍웨이는 남성적인 행동가였다. 대서양에서 대어를 낚고, 아프리카의 대 평원에서 맹수를 잡았으며, 스페인에서 투우를 즐겼고, 전장을 찾아다니며 의로운 일에 목숨을 내걸었다. 그는 비겁하지 않은 용사였다. 그리고 용기와 의로움이 개척한 인간 실존의 탁월한 모습을 소설 양식을 통해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위대한 작가였다. 개성이 강하고 독선적이면서도 허무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헤밍웨이는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특히 와인 샤토 마고를 즐겨 마셨고 손녀의 이름도 마고라고 지어줄 정도였다. 그는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아오다가 요양 중이던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자신이 애지중지해온 사냥 엽총으로 자살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당혹과 애도가 전 세계에 물결쳤다. 내가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은 공군에 입대하여 대방동에 있는 공군본부 중앙기상부에서 일기예보 관측 교육을 받을 때였다. (끝)

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

러시아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페테르부르크. 세 번이나 찾아온 곳이라 그런지 나는 제정러시아의 타락한 귀족처럼 건들대고 싶어진다. 네바 강에서 유람선을 탈 때는 거침없이 와인 잔을 비웠고, 강변에서는 사관생복 차림의 아가씨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이삭성당을 둘러보고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들어서자 금방 마음이 숙연해진다. 180여년 전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외치며 반란을 도모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들의 함성이 이명처럼 느껴졌는데, 거기에는 절대자유를 외친 푸슈킨의 육성이 녹아 있을 것만 같았다. 푸슈킨은 유배중이어서 반란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체포된 데카브리스트들의 소지품에서 한결같이 푸슈킨의 시가 나올 정도로 그는 이미 반란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농노제로 인한 빈곤, 억압, 착취가 극에 달하자 1825년 12월 14일 약 3000여명의 근위부대 장교와 사병이 원로원 광장(지금의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모여 니콜라이1세에 반기를 들고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시민의 평등, 신앙과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엘리트의식이 강한 귀족 장교들이 민중을 역사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동조마저 꺼려했기 때문에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자유시인 르일레프를 비롯하여 주동자 5명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거나 카프카즈 징벌부대에 편입된다. 결국 러시아는 크림전쟁(1853년)과 니콜라이1세의 음독자살(1855), 그리고 피의 일요일(1905)을 거치면서 훗날 볼세비키혁명(1917)을 맞게 된다. 나는 광장에 세워진 니콜라이 1세의 청동기마상을 보며 만약 그때 반란이 성공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는, 그리고 20세기의 냉전체제는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까를 생각해보았다.

햇살이 살아나자 청동기마상이 더 눈부신 자태를 드러낸다. 제도개선을 요구한 젊은이들을 처형하고 선량한 시민을 몽둥이로 팬 군주의 동상이 외형상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철거되지 않고 사회주의 독제체제에서까지 보호를 받다니.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 동상뿐만이 아니었다. 혼례복을 입은 신혼부부와 축하객들에게 에워싸인 피터 대제의 청동기마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러시아인에게 긍지를 심어주고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성군이라 해도 딸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아들을 감옥에 넣어 죽인 비정한 황제의 동상이 하필 신혼부부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되다니, 정말 러시아인들의 기질과 정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런 러시아인의 인성구조를 푸슈킨의 입장에 대입시켜본다. 반란의 정신적 지주였으면서도 성격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비밀조직에서 소외된 그 입장 말이다. 유배된 몸이 아니었으면 반란에 가담했을 거라고 황제 앞에서 직설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정치적 자유보다는 개인적인 무한자유를 갈망한 푸슈킨의 명분과 본질. 사실 그는 광적인 자유에 빠져왔지만 출생에 걸맞는 귀족적 질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언뜻, 혹 러시아인이 황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전역에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러시아인의 감정에 질펀히 녹아든 푸슈킨. 그는 나폴레옹 전쟁 후 민족의식과 자유주의가 고조되는 격동기에 서구 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여 그것을 러시아적 체질로 육성함으로써 러시아문학을 보편적인 세계문학으로 드높였으며, 또 러시아 문예문체의 표준을 확립이고 사실주의 문학을 전개함으로써 19세기를 러시아문학의 전성기로 만든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만 해도 고골리를 비롯하여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리키 등 세계적인 대가를 꼽을 수 있고, 아흐마토바, 마야코프스키, 나보코프 같은 현대 시인이나 작가들까지 푸슈킨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았다. 푸슈킨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입증하는 몇 가지 사례만 들어도 차이코프스키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악성들의 오페라, 푸슈킨시(市)의 명칭, 푸슈킨 거리, 푸슈킨 박물과, 푸슈킨 문학연구소, 푸슈킨 학회, 푸슈킨의 기념비와 동상, 푸슈킨의 문장에서 따온 격언 등 다양하다. 피터대제가 후진에 머물렀던 러시아인의 의식수준을 고양시켰다면 푸슈킨은 낙후된 러시아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꽃피운 셈이 된다.

오늘 관광의 마지막 코스인 푸슈킨 동상을 찾아갔다. 그런데 나를 맨 먼저 반긴 사람은 애를 안고 구걸하는 아낙네였다. 나는 잔돈 몇 잎을 건네주며 구걸로 생계가 유지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푸슈킨 덕에” 잘 산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푸슈킨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러시아 사람이라고 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럼 당신은?” 하고 물었더니 페테르부르크 사람이란다. 그 멋진 대답이 가이드의 오역(誤譯)인진 몰라도, 그처럼 푸슈킨은 전 러시아에 편재한 제도화된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게이 르보비치는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예비역 소령이었고, 살롱출입과 파티를 낙으로 삼은 한량이었다. 어머니 오시포브나 한니발은 콘스탄티노플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표트르 대제에게 인질로 보내진 이디오피아 황태자의 후손이었다. 그녀의 조부인 아브람 한니발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흑노(黑'奴)로 유명하다. 그처럼 아프리카의 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는 러시아의 사교계에서 '예쁜 혼혈녀'라는 평판이 자자했고 유한마담처럼 향락을 즐긴 탓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에도 태만하여 푸슈킨은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맡겨졌고 일상생활에서도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외가의 핏줄을 받은 푸슈킨은 고수머리에 얼굴이 거무잡잡하고 조급한 성격이었으며, 상상력이 탁월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문학과 철학서적을 탐독한 그는 특히 프랑스 소설을 좋아했고, 플르타크 영웅전, 18세기의 역사물, 연애시, 우화 등을 즐겨 읽었다. 또 외할머니 마리야와 유모 아리나로부터 들은 러시아 민담이나 참칭자 드미트리에 대한 역사 이야기는 푸슈킨의 문학적 정서와 『예브게니 오네긴』같은 대표작을 쓰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

푸슈킨은 1811-1817년까지 차르스코예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있는 유서 깊은 귀족학교 리쩨이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거기서 6년간 수학하면서 많은 서정시를 썼고 궁정시인들로부터 격찬을 듣는다. 푸슈킨은 겨우 15세 나이에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이 주측이 된 문학서클 ‘아르자마스 Arzamas’의 회원이 되어 의고주의(擬古主意)에 반발하는 문학개혁에 동참하기도 한다.

리쩨이는 알렉산드르1세가 황실과 귀족 출신의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시켜 졸업 후에 나라의 요직에 배치할 계획으로 세운 학교로, 3년간씩 저급반과 고급반으로 나뉘어졌으며 교과 과정에는 승마, 수영, 펜싱, 무도 같은 체육종목과 윤리학, 역사, 지리, 수학, 외국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절 푸슈킨은 게으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시적 재능만은 탁월했으며, 성격이 과격하지만 남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리쩨이의 교수진은 러시아의 저명한 학자와 외국에 유학한 젊은 학자들을 반반씩 초빙해 짰는데 늙은 교수들은 황실에 충성하는 전근대적인 학습을 시켰지만 유학파들은 서구의 혁신적인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운동을 가르쳤다. 그래서 리쩨이를 졸업한 학생들의 절반은 공무원이 되고 나머지 절반은 12월당원이나 훗날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주요 인사들로 성장했다. 푸슈킨의 초기작품에 드러난 자유에 대한 열망도 바로 리체이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1817년 리쩨이를 졸업한 푸슈킨은 수도 페테스부르크의 외무성에 들어가지만 이름뿐인 8등관 직위를 간직한 채 3년간 무절제한 방탕생활에 들어간다.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페테르부르크에서 음주와 여색 등 향락에 빠지기도 하고, 문학 선배나 동료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나포레옹 전쟁 후에 팽배했던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데카브리스트의 서클과 어울려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정치시를 쓰기도 했다. 1820년 푸슈킨은 시적 독창성이 뛰어나고 낭만주의의 도래를 예고한 장편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출간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보수적인 구세대의 눈에는 방만하고 경박하고 외설스럽게만 비쳤다.

그 무렵 푸슈킨은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 사귀면서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인 무장봉기 단체 ‘녹색램프’에 참여하여 농노제 폐지 등 정치사상에 물들기 시작한다. 그의 시는 의식화된 지성인들의 애송시가 되었고 젊은이들은 그의 시를 통해 자유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는 송시 『자유』와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시를 썼다가 ‘불온시인’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까람진, 그린카 같은 영향력 있는 선배의 도움으로 구속을 면한 채 남러시아 예까쩨리노슬라프로 추방되었다. 그런데도 푸슈킨은 비밀조직에 실제로 가담한 적이 없다. 친구들은 수다스럽고 경박한 그를 배짱이 없는 인물로 치부하여 중요한 일에서는 소외시켰던 것이다.

푸슈킨의 유배생활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보람된 자유를 누리는 기회가 된다. 폭넓은 독서와 시작에 전념할 수 있었고, 특히 라예프스키 장군 가족을 따라 카프카즈에 머물 때는 천혜의 절경과 다채로운 풍속 등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으면서 새로운 시적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장군의 딸 마리야를 사랑함으로써 연애감정과 낭만을 동시에 만끽하게 된다. 또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시를 탐독함으로써 소위 푸슈킨의 ‘바이런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카프카즈의 포로』, 『도둑 형제』등이 그곳에서 쓴 작품들이다.

푸슈킨은 1823년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로 이송되자 활기를 되찾고 시인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뿐더러,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18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자 어머니의 영지가 있는 미하일로프스코예 마을로 추방됨으로써 매혹시킨 낭만주의와 멀어진다. 사실 그는 광적인 자유와 애정행각에 빠져왔으면서도 그의 출생에 걸맞는 귀족적 질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약 2년 동안 어머니 영지에서 연금상태로 머문 푸슈킨은 고집이 센 아들을 괴물로 여겨온 아버지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지낸다. 그는 『예브게니 오네긴』을 계속 집필하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비극시『보리스 고두노프』와 풍자적 서사시 『누린백작』등을 완성한다. 푸슈킨은 결과적으로 고독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 예술적 체질로 성장한 셈이다.

1826년 푸슈킨은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황제는 그를 불러 분별 있는 행동을 다짐하고 그의 작품을 자신이 직접 검렬한다고 엄명한다. 악명 높은 <제3부서>의 의장에게 감시를 명한 황제는 언행의 보고 뿐 아니라 여행할 때도 황제의 재가를 받도록 지시한다. 푸슈킨은 말이 자유인이지 죄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치적 자유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정치적 자유가 용납될 경우 평준화로 인한 문화의 획일적 하향성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푸슈킨은 정치적 자유보다는 개인적 자유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황제와의 독대에서 반란 장소에 있었다면 당연히 반란에 가담했을 거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으며, 데카브리스트에 동조하는 시들을 발표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정치 이데올로기보다는 시와 예술의 자유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절대군주를 찬양하는 작품을 쓸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했다. 더구나 자유를 열망하는 그의 반역정신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16세의 미녀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만난 게 원인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마돈나>와 유사한 나탈리야의 미모에 반한 푸슈킨은 청혼하기에 이르지만 그녀는 냉담하게 대할 뿐이었다. 푸슈킨이 허영심 많고 속물적인 나탈리야에게 깊이 빠진 이유는 바로 그녀의 냉담 때문이었다. 나탈리야의 엄마인 곤차로바 부인은 딸에게 지참금이 없는 데다 더 나은 구혼자가 나타나지 않을 성싶자 1830년에야 푸슈킨의 가문과 문명을 높이 사서 약혼을 허락한다. 하지만 장모의 위선적이고 천박한 실체를 경험하고부터는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푸슈킨은 사실 자신의 여성 편력에 종지부를 찍고 안정된 가정을 원한 데다, 결혼 자금으로 볼지노의 영지를 내준 아버지의 배려를 무시할 수도 없어 파경만은 피할 마음이었다.

푸슈킨은 재정상태를 점검할 겸 며칠 동안 머물 예정으로 볼지노에 갔다가 콜레나 창궐로 석 달 가량 머무르게 된다. 그 바람에 ‘놀라운 볼지노 가을’이 시작되는데,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고가 완성되고,『엘레지』,『잠 안 오는 밤에 쓴 시』,『벨킨 이야기』등 서정시들과 산문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다. 특히 서정시 일색이었던 그의 작품 세계가 산문과 드라마로 변형된 것은 그가 “산문의 중요한 미덕은 정확성과 간결성이다.” 라고 피력했기 때문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푸슈킨의 고향인 모스크바로 떠나기 직전 아흐마토바 박물관을 관람했다. 혁명정부가 궁전을 개조하여 다세대주택으로 개조한 건물 안에 박물관이 있었는데, 방을 일렬로 쭉 튼 전시실에는 그녀가 쓰던 침대, 책상, 의자, 화장대, 거울, 책장, 옷장, 그림액자, 스탠드, 책 등 일상 용품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종교적 정서가 녹아 있는 애정시를 써서 문명을 날린 아흐마토바는 첫남편 사형, 아들 구속, 재가한 뿌니닌과의 불화 등 불운한 생을 살다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난다.

박물관 답사에 욕심을 부리다보니 모스크바에는 밤늦게야 도착했다. 나는 곧장 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노보데비치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문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예술계 인사가 잠들어 있는 묘지는 각각 개성에 맞는 조각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마치 조각공원을 연상시켰다. 고골리의 세련된 묘비와 주황색 대리석으로 평장한 마야코프스키의 무덤이 눈길을 끌었는데, 고골리의 묘비는 『외투』 등 그의 소설에서 읽었던 해학성과는 다른 이미지를 풍겼고 마야코프스키의 무덤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당한 핍박만큼이나 육중한 이미지를 풍겼다.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슈킨 기념관은 점심을 먹은 후에야 찾아갔다. 오일 달러 덕인지 옛날과는 다르게 주변이 현대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1490년대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아르바트 거리는 시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푸슈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등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지금도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공간으로 번다했다.

나는 푸슈킨 기념관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화가 앞에서 다리를 꼬고앉아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리는 아릿다운 아가씨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은 훗날 내 러시아 여행의 싱싱한 이정표로 남을 것이었다.

푸슈킨 기념관은 예전처럼 그들 부부의 동상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31년 갓 결혼한 그들 부부가 3개월가량 2층을 세내어 살던 집이었다. 나는 두 번째 와보는 곳이어서 대충 둘러보고 프레치스첸크에 있는 푸슈킨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제정러시아의 귀족 소유였던 저택을 소비에트 정부가 박물관으로 꾸몄으며 1999년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현대식으로 개조했는데, 푸슈킨의 작품 제목을 따서 이름을 붙인 각 전시실에는 푸슈킨의 주변 인물의 초상화와 소지품, 가구, 편지, 그림, 데드마스크, 작가의 저서, 육필원고, 그리고 작품에 나오는 당시의 물품들을 구해서 전시하고 있었다. 지붕을 유리로 덮은 중앙홀, 강당, 원형 콘서트홀에서는 시낭송, 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마침 지하에서 전시중인 안데르센 작품을 관람하고 이층 계단 위에 있는 푸슈킨의 부인 나탈리야의 입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연초록 드레스로 우아하게 차림한 부인 나탈리야의 입상은 외견상으로는 신비감이 느껴질만큼 아름다웠다. 그게 실물 모습이라면 푸슈킨이 애간장을 녹일만도 했다.

그녀는 왜 거기에 서 있을까? 그녀가 공식적인 아내여서일까?

1828년 푸슈킨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16세의 미녀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보자 넋을 잃는다. 얼굴이 라파엘로의 그림 <마돈나>처럼 생긴 나탈리야는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여자였지만 푸슈킨은 자기의 청혼을 거절하는 그녀의 냉담함에 더 깊이 빠지고 만다. 위선적이고 천박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겨우 약혼을 승낙 받은 푸슈킨은 1831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해 가을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연년생의 두 딸을 낳는다. 하지만 남편의 문학세계를 이해 못하는 나탈리야가 사치만 일삼자 가정은 차츰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데, 사교계에 빠진 아내 때문에 시간과 재산이 축나고 귀중품은 모두 전당포에 잡혀야 했다.

남편의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교계의 여왕처럼 군림한 나탈리야는 궁정행사에서 황제의 눈에 들게 되고, 그녀의 미모에 반한 황제는 그녀를 자주 볼 수 있도록 푸슈킨을 시종보에 임명한다.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지만 푸슈킨은 그 직책을 통해 역사의식에 눈뜨게 된다. 그는 피터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와 고골리 작품의 전범이 된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레르몬토프의 『현대의 영웅』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원형이 된 역사소설 『대위의 딸』등을 써 러시아 리얼리즘문학의 기초를 다진다.

1836년 푸슈킨은 소망해온 문학잡지 <현대인>을 발간하지만 재정난 때문에 자기의 작품으로 페이지를 채워야 했고 장편소설 『대위의 딸』도 여기에 실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뒤흔든 당대 최대의 정치범을 소설 속에 형상화한 『대위의 딸』은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문체로 푸슈킨 산문 예술의 극치라는 평을 받았다.

푸슈킨의 작품세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평가했듯 “모든 것을 포용한 보편성”으로 요약될수 있다. 그는 시, 소설, 희곡, 평론, 기행문, 역사물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하고도 <운문소설>이란 새로운 장르를 창안했으며, 작품마다 해당 장르에서 전범이 될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고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인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고전주의와 서구적 낭만주의, 그리고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풍토로 자리잡게 될 사실주의의 요체가 녹아 있다.

푸슈킨의 대표작인 『예브게니 오네긴』은 전형적인 귀족 청년과 러시아 여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주인공 다치야나는 어떤 유혹과 향락에도 굴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강인한 러시아적 여인상으로 부각되는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나타샤나 고리키의『어머니』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와 반대로 오네긴은 현실성이 결여된 쓸모없는 인간, 즉 재치와 빤지르르한 용모로 여인에게 너스레를 떨다가 결국 자기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남성상으로 평가받아 왔다. 러시아의 문예비평가로 비판적 리얼리즘의 이론을 확립한 벨린스키가 "러시아 생활의 백과사전"이라고 격찬한 이 운문소설은 산문이 주는 유장한 문장 구조보다는 압축된 점묘식 묘사로 인물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최신 유행 머리에

런던 댄디처럼 차려입고

대망의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프랑스어를 나무랄 데 없이 구사하고

날아갈 듯 추는 마주르카에

인사하는 맵시도 매끄러우니

통속적인 애정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에서 오네긴과 다치아나는 세계 문학사에서 불후의 남녀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푸슈킨의 왕성한 문필활동과는 달리 그의 가정은 점점 더 황폐해져갔다. 나탈리야가 새로운 염문을 뿌렸던 것이다. 네덜란드 공사의 양자인 프랑스 태생 단테스는 잘생긴 용모를 무기 삼아 페테르부르크의 살롱계를 휘젓다가 나탈리야에까지 접근했으며,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익명의 투서가 푸슈킨과 그의 친지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푸슈킨의 진보적인 사상을 미워한 세력가들의 음모라는 말도 있고, 나탈리야와 황제간의 불륜을 덮어두기 위한 계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푸슈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청하고 만다.

1837년 1월 27일 낮 4시에 결투는 거행되고, 결과는 푸슈킨이 총을 맞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푸슈킨은 즉시 집으로 옮겨져 유명한 의사 아렌트의 치료를 받는다. 동료 문인들인 쥬코프스키, 오도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등이 달려오고 수천 명의 시민이 그의 집 주변에 몰려들었으며 병세에 관한 쥬코프스키가 문에 붙여놓은 용태서를 읽으려고 야단들이었다. 결국 1837년 1월 29일 푸슈킨은 단테스가 쏘았던 1탄을 맞고 37년 8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는 죽기 직전 아내의 무고함을 믿는다며 나탈리야를 위로하고 뚜르게네프에게 매장을 부탁한다.

푸슈킨의 집 주변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황제는 푸슈킨의 죽음이 민족적 손실이란 분위기로 고조되자 군중시위를 걱정하여 장례를 초라하게 치르도록 엄명한다. 푸슈킨의 서재는 샅샅이 수색되고 의심이 드는 기록물은 모조리 압수되었다. 시인 오도예프스키는 <러시아 시의 태양이 졌다>는 추도문을 발표하여 정부의 질책을 받았고, 레르몬토프는 푸슈킨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교계와 궁정을 질타하는 <시인의 죽음에 부쳐>를 발표했다가 카프카즈로 유배되었다. 황제의 그런 강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푸슈킨의 시와 명성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예브게니 오네긴』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푸슈킨아 살아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글은 아직도 수많은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끝)

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

여객기가 이륙하여 궤도를 잡자 좌석에 부착된 모니터를 켰다. 여러 메뉴 중에서 천문학에 대한 프로를 클릭하니 마침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빅뱅 원시시대를 거친 우주는 137억 년 전 별의 시대에서 지금의 황금기에 이르렀고, 앞으로는 퇴화기를 맞이할 텐데 블랙홀시대가 왔다가 에너지 소멸에 의해 블랙홀도 사라지면, 시간이 무질서해지는 광입자시대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죽이기에 딱 알맞은 프로였다.

셰익스피어란 이름이 언제까지 존속할지는 몰라도 그 이름이 존재할 공간인 지구와 그 작은 공을 껴안고 있는 태양계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것도 우주의 수명에 비하면 아주 짧은 촌음밖에 남지 않았다. 즐겁다. 어서 셰익스피어가 소멸되어야 한다. 그가 사라지면 세상은 평온해진다. 모두 허명과 허욕을 버릴 것이다. 그 경이로운 천문학 프로를 2회 연속 보고 나니 어느새 여객기는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다.

해질 녘에야 런던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가 준비한 차를 타고 호텔로 직행했다. 교외 숲속에 있는 호텔이라 분위기가 정갈하고 조용하다. 피곤해서 곧바로 방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9층 라운지로 올라가 와인을 마시다가 잔을 들고 옥상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니 차츰 기분이 몽롱해진다. 별빛 뿌연 옥상이 마치 엘시노 궁정의 망대 같다. 막연히 뭔가가 기다려진다.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갑옷을 입은 혼령이 나타난다. 그 혼령이 내게 말한다.

듣거라, 햄릿아. 덴마크 국민들은 내가 정원에서 잠자던 중에 독사에

물린 것으로 속고 있다. 내 고귀한 젊은 아들아. 네 아비를 물어 목숨을

빼앗은 독사는 지금 아비의 왕관을 쓰고 네 에미를 왕비로 삼았니라.

이튿날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버스로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포드 어폰 에어본(Stratford-upon-Avon)으로 향했다. 구름이 잔득 낀 날씨지만 고속도로 양측으로 이어진 시골 전원 풍경이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3시간 가까이 걸리는 흥분된 코치 투어다. 너른 초원과 초원을 에두른 수목들, 그리고 간간히 평야에 나타나는 주황색 지붕 농가들이 아름답다.

평원은 거의가 가축의 초지와 밀, 감자, 보리가 자라고 수목은 참나무로 불리는 활엽수와 침엽수가 인위적인 조경처럼 섞여 있다. 이따금 보라색 라벤다꽃과 유채꽃이 만발한 밭이 나타나기도 한다. 초지에는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땅은 벼농사가 안 되는 토질이다. 잉글랜드는 거의가 평원인데도 감자나 밀 같은 밭농사뿐이다. 산협으로 이뤄진 스코틀랜드는 아직은 영국 땅이지만 독립을 추진할 정도로 잉글랜드에 반감이 깊다. 원래 켈트족이 살던 땅에 5세기 경 앵글족과 색슨족이 쳐들어와 지금도 앙금이 남아 있고 독립을 앞둔 상태지만 주민의 잔류 정서가 반이어서 독립이 쉽지 않다고 한다.

요크셔 지방으로 빠지는 이정표가 지나가고 금방 분기점이 나타난다.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떠오른다. 요크셔는 옛날에 바이킹 출몰이 잦았던 지방이라 사람들의 기질이 가장 거칠다고 한다. 영국에서 발생하는 큰 사건은 음산하고 황량한 요크셔 지방에서 발생한다는데『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을 광적으로 사랑한 히스크리프를 연상하면 이해되는 말이다.

파란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는가 싶은데 금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젖은 땅에 다시 햇살이 번진다. 하루에 4계절이 공존한다는 영국 날씨답다. 양떼들도 날씨의 변덕에 익숙한 모양인지 비가 쏟아질 때도 여전히 풀만 뜯는다. 버스가 언덕을 넘자 아득한 초원이 펼쳐진다. 그 초원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으니 소년시절에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떠오른다. 성장기에 세계문학을 접하면서 맨 먼저 읽은 작품이『햄릿』이다. 요즘 같으면 저작권이 엄격해서 키드(Kyd)가 쓴 『햄릿』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이 무시되고 있었다.

버스가 갑자기 속력을 늦춘다. 인파의 흐름이 차를 막는다. 어느새 셰익스피어 컨트리로 불리는 스트랫포드에 도착한 것이다. 승객들의 탄성이 터져나온다. 온 마을과 도로가 사람과 차량으로 뒤덮였다.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스트렛포드 시내를 보니 인파로 북적대던 우리네 시골 장터가 연상된다.

버스에서 내려 기념관 쪽으로 걸어가자 거기에도 각국의 관광객이 길게 줄서 있다. 유럽사람, 북미사람, 중남미사람, 아프리카사람, 호주사람, 아시아사람. 그 중에는 일본사람, 중국사람도 눈에 띈다. 눈빛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모두 셰익스피어에 빨려들고 있다.

도로에 쭉 서 있던 관람자들의 줄이 줄어들고 드디어 기념관 입구에 들어선다. 먼저 셰익스피어 시대의 부락을 재현한 그림이 발길을 막는다. 저서, 원고, 연극이나 영화 사진 등이 진열된 기념관은 그의 명성에 비해 소박한 편이다.

기념관을 관람하고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생가로 이동했다. 연결이 되어 있어 이동이라기보다 관람의 연속인 셈이다.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고친 부분이 많다고 한다. 비좁은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리며 당대의 가구와 유품들이 진열된 방과 집필실 등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그 시대의 가구와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아버지 때의 가업 생산품인 가죽 장갑이 상징적으로 벽에 걸려있다. 책상 앞에 앉아 집필하는 셰익스피어의 밀랍 테라코타가 벗겨진 대머리 탓인지 무척 낯설어 보인다. 차라리 하얀 회벽과 투박한 목재로 구조된 방과 계단이 친밀감을 풍겨준다. 실내 구석 어디에는 분명 셰익스피어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이었다.

기념품 매장에서 흉상과 필기도구를 사고 꽃밭으로 꾸며진 후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한 생가의 외형을 눈여겨보다가 골목길을 돌아 거리로 나왔다. 생가 앞에는 카페와 기념품점들이 즐비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지은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끼어 있는데 갈대지붕은 수명이 길어서 300년 이상 간다고 한다.

500년이 넘었다는 목제 고옥(古屋)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성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로 갔다. 14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대법관인 존에 의해 세워진 그 교회 북쪽 벽 가까이에는 대리석으로 치장된 셰익스피어의 묘가 있고, 매끈한 묘석 위에는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시가 새겨져 있다.

내 벗이여, 신의 뜻을 거역해서

여기에 묻힌 시체를 훼손하지 마오

이 묘에 손대지 않는 사람에겐 축복이 있고

이 시체를 옮기는 사람에겐 저주가 내리리라.

시구(詩句) 때문인진 몰라도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무덤은 지금까지 아무도 손 댄 적이 없고 원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회 내부를 구경하고 바깥 정원으로 나왔다. 당시 마을 공동묘지였던 정원에는 이끼 낀 묘비석들이 비스듬히 서 있어 세월의 하중이 느껴진다. 교회 입구를 나와 마을길을 걷다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에이본 강가의 포구와 왕립극단 소유의 셰익스피어 극장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셰익스피어 극단은 의전 장관인 챔버린의 후원을 받았으나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6세가 왕위를 물려받자 챔버린 극단에서 국왕극단(단원11명)으로 승격되어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서른 한 살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와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의 역사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한 사람은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졌고 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요크(York)와 랭커스터(Lancaster)의 두 왕가(王家)간의 싸움인 ‘장미전쟁’에서 리차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헨리 튜더(Henry Tudor)가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이고, 그 뒤를 이은 아들이 수장령(首長令)을 제정 공표한 헨리 8세이다. 그는 시녀 앤 블린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본부인 캐서린과의 이혼을 로마법황이 불허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새로 영국국교(성공회)를 만든 과격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앤과 결혼했지만 딸만 하나 낳고 왕자를 두지 못했다는 애매한 죄목으로 왕비를 사형에 처했는데, 그 비운의 1000일의 앤이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활기찬 시대였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기존질서가 흔들리면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발달, 교육확대, 도시발전 등으로 새로운 변화가 물결쳤다. 신교와 구교가 처참한 갈등을 빚었고 특히 여왕이 신교로 경도되어 있어 구교에 익숙한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지상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 위임 받은 대리인임을 천명하고 거역하는 자는 엄격히 다스렸다.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신대륙 미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여 스코트랜드를 영국으로 통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교(Protestantism)가 시민의 일상에 파고든 것도 그 시대였다. 당시에는 르네상스 문학도 꽃을 피웠는데, 스펜서, 모어, 베이컨, 셰익스피어, 벤 존슨, 말로, 릴리, 존 던 같은 문학, 철학, 신학 등 여러 분야의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극단도 번창했다. 극장가에 걸인이나 불량배들이 들끓어 시 당국의 규제가 불가피했고, 광대나 배우들이 반기독교적인 언사를 써서 청교도들의 박해를 받았으며, 배우나 극단은 국왕이나 귀족의 하인으로 허가장을 받아야 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불편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야 말로 극문학(劇文學)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극작가로 추앙받고 있는 셰익스피어. 10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는 이념, 종교,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전 세계인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폴저도서관 조사에 의하면 『햄릿』에 대한 저서만 해도 1877년 이후의 통계에서는 25일마다 한 권씩 출판된 셈이고, 단테,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라신에 대한 모든 연구 문헌을 합쳐도 셰익스피어 한 사람의 연구서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생애나 인물은 실증할 자료가 별로 없어 거의가 추정에 의해 거론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출생 날짜도 기록이 없어 그가 묻혀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보존된 세례 날짜를 근거로 추정할 뿐이다. 1564년 4월 26일에 세례를 받았으니 생후 3일 정도가 지나야 세례를 받는 관례로 봐서 4월 23일을 출생 날짜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묘비에 사망 일자가 1616년 4월 23일로 적혀 있어 출생 날짜와 사망 날짜가 같게 된다. 또 그날은 공교롭게도 잉글랜드 수호 성자인 성 죠지 축제일이어서 셰익스피어의 출생일은 의미가 더 크다.

생애가 그러하듯 그의 대표작 역시 선정하기가 힘들다. 그가 쓴 희곡 중에서도 어느 작품을 대표작으로 선뜻 내세울지 망설여질 만큼 거의 모든 작품이 단독성을 지니고 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드』 같은 4대 비극이나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에서 대표작을 고르자니 인간의 존엄성과 인종차별을 다룬 『베니스의 상인』을 비롯하여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말괄량이 길들이기』 같은 희극이 머리를 들고, 『헨리 5세』, 『헨리 6세』, 『헨리 8세』, 『리차드 2세』, 『리차드 3세』, 『리차드4세』, 『존왕』 같은 사극이나 『템페스트』, 『페리클레스,』 『겨울 이야기』 같은 로망스도 머리를 든다. 비극 작품을 우선 내세우는 현실에 대해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사뮤엘 존슨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이렇게 옹호했다.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숙달된 작법이랄 수 있지만 희극은 그의 본능적인 재능이랄 수 있다”

본연의 체질에서 우러난 희극의 형성미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가적 이미지가 비극에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희극이나 역사극이나 로망스보다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이 일반 대중들의 피부에 더 진하게 묻어 있기 때문인데, 그의 비극에는 그만한 감동유발 요인이 녹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인간 내면이 욕망하는 본질적인 미학이 내재하기 때문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모방(mimesi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 모방은 원인, 과정, 결과의 순차와 같은 인간행위의 모방이지만 단순한 복제형식이 아니라 ‘예술적인 의도’에 의해 재구성되는 창작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는 구성(plot), 성격(character), 어법(diction), 사상(thought), 장면(spectacle), 노래(song) 등 여섯 가지 요소를 지녀야 비극이 형성되고,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배우와 관객이 공유하는 체험이며, 때문에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함으로써 정서적 순화를 가져다줘야 한다면서 선과 진실이 승리하는 시적정의(poetic justice)까지 강조했다.

이에 대해 중세를 대표하는 초서(Chaucer)는 반드시 극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전제하고, 음악적인 율격을 통해서도 비극을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작품 『캔터베리 이야기들』에서 자신의 주장을 율격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비극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다가/ 높은 신분에서 불행 속으로 떨어져/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초서는 비극의 원인을 예로 들면서, 천사 루시퍼가 지옥으로 떨어진 원인은 죄악 때문이고, 아담의 경우는 비행 때문이고, 삼손의 비극은 아내에게 힘의 원천을 누설한 실수이고, 네로의 비극은 오만이고, 시저의 비극은 여신의 변덕이 원인이라고 말함으로써 성격결함 말고도 운명적 요인을 개입기킨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주인공들의 성격 결함이란 데서 아리스텔레스의 비극론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리고 비극의 원인도 뚜렷한 부정적 성격보다도 생활인의 덕목(오셀로의 남을 믿는 성격 등)이랄 수도 있는 사소한 결함이 비극을 초래하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화를 입히는 게 특색이며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다. 무력한 인간의 능력이 원인으로 작용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상식적인 인과응보나 시적정의가 들어있지 않아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점이 있고, 그것이 평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희극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비극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기괴한 행동의 모방으로 여겨진 고대 그리스 희극이나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현대 희극과도 구별된다.

셰익스피어만큼 비평가들의 견해가 다양한 경우도 없다. 누구는 그의 작품을 기독교극으로 보고 누구는 속세극으로 본다, 그의 성향에 대해서도 누구는 카톨릭 작가로, 누구는 개신교 작가로, 누구는 성공회 작가로, 누구는 반기독교적 작가로 본다. 그처럼 셰익스피어에 대한 시각은 너무 다양하고 상충되기 때문에 브래들리(A.C. Bradley)는 셰익스피어의 사상을 논할 때는 그의 전 작품을 놓고 논해야지 몇몇 작품으로는 통일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롤리(Walter Raleigh) 역시 셰익스피어의 작품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기존의 방식으로는 식별이 어렵다고 말했다. 즉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유형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위의 두 평론가는 비극의 본체론적 입장에서 론리는 구성(plot)을, 브래들리는 성격(character)을 본체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양적 질적으로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작들이고 보니 저자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작품마다 주제가 다르면서도 전문성을 지니고 있어 한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며 혼자 썼다 해도 학문 수준이 높은 석학에 의해 쓰여진 것이지 셰익스피어처럼 학교교육이 열악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이며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셰익스피어를 스트랫포드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요즘에는 그런 의문이 논리 정연한 체계를 갖춘 책으로까지 나왔는데, 사실 영국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실제 인물은 ‘여왕의 아들’이란 말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1558년에 등극한 엘리자베스 1세의 아들이라면 그녀의 숨겨진 아들로 소문난 프랜시스 베이컨이 실제 셰익스피어인 셈이다.

버지니아 펠로스가 쓴 책에 의하면 런던의 프랜시스 베이컨 학회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실제 저자가 베이컨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19세기에 창립되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의 실제 인물 찾기는 오래전부터 시도되었다.

아무튼 셰익스피어가 여왕의 아들이면 어떻고, 신의 아들이면 어떻고, 보잘것없는 촌부의 아들이면 어떤가. 38편의 희곡과 2편의 장시와 154편의 소네트 등을 쓴 사람을 세익스피어라 지칭하면 될 것 아닌가.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쇼터리(Shottery) 마을로 향했다. 부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의 생가가 있는 그곳에도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셰익스피어보다 8살이 많은 연상의 여인 집이라 그런지 더 고풍스러워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벽돌집인데 비해 갈대로 지붕을 덮은 초가집이지만 마당에는 꽃밭이 오밀조밀 꾸며져 있고 내부도 깔끔하게 회칠이 되어 있어 셰익스피어의 생가보다 더 양반스러우면서도 여성스러워 보인다. 농기구가 보관된 창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너른 정원이 농지였던 모양이다. 본채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 발치에 고풍스런 나무의자가 놓여 있어 지친 다리를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420여 년 전 18살의 앳된 셰익스피어가 큰누나 같은 해서웨이를 찾아와 어떤 몸짓으로 접근했을지를 상상하며 지그시 미소를 지어본다. 셰익스피어와 해서웨이의 결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1582년 11월 27일에 결혼허가서가 발행되고 다음날 결혼증서가 발행되었는데, 이미 임신한 지 4개월이 된 걸 보면 남녀가 일을 먼저 저지른 탓에 서둘러 식을 올린 게 아닌가 싶다. 물불을 못 가리는 셰익스피어가 먼저 대들었는지 노처녀 해서웨이가 먼저 미소년을 유혹했는지 그게 궁금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결혼허가서에는 신부의 이름이 훼이틀리로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날 발행된 결혼증서에는 해서웨이로 등재되어 있어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돈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해명은 셰익스피어가 훼이틀리를 사랑하여 결혼할 단계에 이르자 이미 임신한 해서웨이가 훼이틀리를 눈물로 설득하여 양보를 얻었다는 설과 담당 직원이 실수로 결혼허가서를 잘못 기입했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서 만약 전자가 사실이라면 셰익스피어는 한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연상의 여인과 놀아났다는 셈이 되어 셰익스피어의 도덕성마저 엿볼 수 있게 된다. 어쨌든 6개월에 첫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로 보아 셰익스피어를 정열이 넘치는 사춘기의 젊은이로, 나이 많은 해서웨이를 정숙하지 못한 처녀로 낙인을 찍는 사람이 많은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 부실은 끊임없이 화제를 유발시킬 소지가 있어 흥미롭다.

윌리암 셰익스피어는 아버지 존(John)과 어머니 메어리(Mary Arden) 사이에서 8남매 중 세 번째 출생한 맏아들이다. 아버지 존은 고향을 떠나 스트랫포드에 정착하여 맥주 감식가로 임명된 그해 양반 집안의 딸 메어리와 결혼한다. 그 후 장갑, 혁대, 지갑, 앞치마 같은 피혁제품을 생산하고 소맥 판매 독점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아 그 재력으로 읍 의원, 징수 책임관, 부읍장을 거쳐 읍장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관직에서도 물러나고 교회 예배에 불참하여 국교기피자로 보고되기도 한다. 그가 몰락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카톨릭에 경도된 존이 개신교를 옹호한 국왕의 관청으로부터 미움을 샀다는 설과 오랫동안 관직에 머문 탓에 사업체가 기울었다는 설이 있다.

가계가 기울자 어린 셰익스피어(13세쯤)는 푸줏간 하는 아버지와 함께 도살장에서 일했다는 게 유력한 설인데, 송아지를 멋진 솜씨로 도살하면서 무슨 대사를 흥얼거렸다고 하니 선천적으로 광대기질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의 교육은 소년시절에 문법학교에 다닌 게 고작이고 그나마 졸업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의 왕립문법학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무상교육을 실시했으며 교사들 거의가 옥스퍼드 등 대학 출신이어서 어느 학교에도 뒤지지 않았다. 교재로는 카토(Cato)의 격언집과 릴리(Lily)가 저술한 『라틴어 문법』으로, 이 문법은 미국의 개척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저학년 교재로 사용되었다.

고학년 교재로는 로마의 철학자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고대 로마의 희곡작가 테렌티우스, 로마의 서정시인 오비디우스, 로마의 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고대 로마의 희곡작가 플라우투스 등 로마 고전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었다. 그 외에도 희랍어를 익혀서 역사서와 고대 문학을 읽었을 것이다.

1585년 2월부터 1592년 9월까지 약 8년간을 셰익스피어의 행방불명기간(the lost years)이라 한다. 존 오브리(1626-97)는 1681년에 쓴 『짤막한 전기들』에서 셰익스피어는 푸줏간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도왔고,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밝혔는데 교사 생활은 교육배경이 열악한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지식수준이 높은 작품을 썼는지에 대한 의심을 지우는 단서를 제공한다.

셰익스피어가 고향에서 런던으로 떠난 시기는 158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상경 동기로는 고향의 동갑내기인 리처드 필드의 인쇄업 성공이 자극제가 되어 런던에 갔다는 설과 토마스 루시 경의 공원에서 불량배들과 사슴을 잡아먹다 처벌을 받고 그 분풀이로 조롱하는 발라드를 썼다가 중벌이 두려워 런던으로 도망쳤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상경 직전 스트랫포드를 방문한 5개의 극단 중에서 어느 한 배우와 친교를 맺고 떠났다는 설이 있다.

런던에서 극단에 고용되어 셰익스피어가 처음 맡은 직책은 극장 입장객들이 타고 온 말을 돌보는 일이었다.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쓴 로우는 그 직업을 ‘매우 비천한 자리’라고 적었다. 그후 배우와 번안자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부상했으며, 말로에게서 무운시(無韻詩)를 모방하여 극 쓰기를 시도했다. 1592년에 사망한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비난할 정도로 그는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어 행방불명기간에 극작수업을 받지 않았나 싶다.

1597년, 셰익스피어는 고향 스트랫포드에서 가장 손꼽히는 저택이며 런던 시장이 은퇴생활을 즐기던 '뉴 플레이스‘를 거금 60파운드에 구입한다. 그가 이미 명성과 함께 재력도 축적한 상태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날이 갈수록 언어구사력과 성격창조가 무르익어간 그는 영국 최고의 극작가로 부상했으며 특히 대학생들로부터는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스펜서와 영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서를 능가하는 존경을 받았다.

1613년 챔버린 극단의 전속 무대였던 글로브 극장이 역사극 『헨리 8세』 공연 중에 불타자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1616년 3월 25일 유서를 작성하고 한 달 후쯤인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망 원인은 영국 최초로 계관시인이 된 벤 존슨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병을 얻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의 유서에는 맏딸 수잔나를 상속인으로 정하고 아내 앤 해서웨이에게는 3분지 1의 재산과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적혀있다. 여기에서 3분지 1은 당시의 관례이며, 좋은 침대는 손님용이고 다음으로 좋은 침대가 부부용이어서 애틋한 사랑의 증표로 남겨준 게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 사망 후 해서웨이는 뉴 플레이스에서 7년 동안 장녀 수잔나 부부의 효도를 받으며 지내다가 1623년에 사망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여왕 시대에는 튜더 왕조의 정당성과 충성심을 고취하는 사극과 낭만주의적인 톤에 경도된 희극이 주종을 이룬 반면, 절대 왕권을 다지려한 후자의 시기에는 운명의 비극성에 경도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셰익스피어가 돈독한 기독교 신자임은 의심할 바 아니다. 그런 그가 구원과 같은 본격적인 종교극을 쓰지 않은 이유는 신본주의 윤리보다 현세윤리에 밀착시킨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영향인 동시에,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자신의 성격 탓이랄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문예부흥의 과도기에서 옛 것보다 새 것을 취하려는 시민의 욕구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과격하고 저속한 취향을 인본주의에 부합되도록 정화시켰다. 문예부흥기의 영국인들은 이성을 멀리하고 감성에 젖어 격렬하고 잔인한 유희를 선호했는데 곰이 개를 밟아죽이는 경기나 심지어 단두대에서 사형수가 피를 뿜으며 처형되는 광경을 즐겼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복수극의 인기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 시대 영국인들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노드릅 프라이는 셰익스피어가 신학적 범주에 속하는 연극을 쓴 적이 없고 속세적인 인간 생활에 관심을 보였으며, 따라서 속세 질서에서는 기독교적 사상과 비기독교적 사상이 중복되거나 일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셰익스피어이기에 기독교 사상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저항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기독교 사상, 즉 대 우주적인 지혜를 작품에 드러낼 수 있었다. 그의 불후의 고유성과 위대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문인의 단계를 지나 신화적 인물로 전설화되어가고 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자연인보다 더 생동감 첨치는 인물로 창조되었기에 그 성격은 불멸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전 인류의 원형이 되면서도 개인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의 창조력은 유형과 개성을 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즉 개성을 유형화시키는 동시에 유형을 개성화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그의 극의 본질적인 매력은 비유적인 암시로 상상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다 하겠다.(끝)

괴테와 자연, 그리고 인간적 신의 욕망

마드리드를 출발한 버스는 7일 만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독일까지 여행하는 동안 로마, 베니스, 취리히, 인스부르크, 비엔나, 뮌헨을 차례로 들렀던 것이다. 앞으로 코펜하겐, 암스테르담, 파리를 거친 후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하면 이번 여행은 끝이다.

그러니까 괴테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를 찾아가기 위해 서유럽 9개국의 수도와 대도시를 뒤지는 셈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여행이 괴테를 찾아가는 긴장된 발길이라면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여행은 괴테를 만난 후에 쉬어가는 풀어진 발길이다. 긴장된 발길은 괴테를 그리워하는 여정이고 풀어진 발길은 괴테를 음미하는 여정이다.

23년 전의 패키지 투어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지만, 예전에는 여행코스에 따른 탐방으로 그친데 비해 이번에는 문학기행을 써야 하는 데다 괴테의 문학세계에 더 깊이 파고들 욕심이 생겨 몹시 긴장된다.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프랑크푸르트는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베를린이 행정 수도라면 프랑푸르트는 경제 수도로 인식될 만큼 금융과 상업이 발달하여 영국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유럽중앙은행 본부와 세계 수백 개의 금융기관이 밀집한 국제금융의 메카답게 신도심의 고층건물들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크푸르트가 ‘괴테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더욱 육중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 수도라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어 프랑크푸르트를 가장 이상적인 도시로 채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경제라는 아주 이질적인 소재를 조화시킨 예술품이랄까? 그런 혼성의 조화를 강조하려는 듯 뢰머광장 근처에 위치한 괴테공원에는 유럽통합을 상징하는 유로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괴테박물관, 괴테공원, 괴테동상 괴테대학교 등 문호 괴테를 독일지성의 상징으로 내세우려는 독일사회가 그런 조형물을 허용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움보다 오히려 낯선 의도성을 엿보게 한다.

유럽통합과 괴테정신?

만약 그렇다면 괴테를 순수 문인 이상의 어떤 상관물로 설정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고 사실대로 유럽통합과 괴테문학의 관계항에만 국한시킨다면 그 또한 되씹어 볼 일이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이탈리아에는 단테가 있으며 그리스에는 호메로스가 있잖은가.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내 발길은 어느새 괴테하우스 입구로 다가선다. 괴테가 태어나 여동생 코넬리아와 함께 성장했고, 그가 26세 때 바이마르 공국의 초청을 받아 떠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던 생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전파되어 4년여에 걸친 복구 작업으로 제 모습을 되찾았다. '프랑크푸르트 시민의 위대한 아들'이라고 사랑을 받았기에 파괴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쌓을 정도로 원형 보존에 심혈을 기울인 복구였다.

접수대를 통과하여 생가로 들어서니 모든 시설이 낯설어 보인다. 집기가 진열된 1층 부엌 위치는 물론 중세 악기들이 전시된 2층 방들도 어디가 ‘음악의 방’이고 어디가 ‘북경의 방’인지 잘 구분 되지 않는다. 3층 괴테가 태어났다는 방도 처음 보는 것만 같다. 다만 괴테가 『파우스트』 1편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한 4층 방만은 낯익어 보이는데 책상과 그 앞에 놓인 의자가 무척 정답게 느껴진다. 23년 전 나는 그 의자에 앉아 괴테의 집필 모습을 연상하다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 한 토막을 속으로 읊었던 것이다.

파우스트 “자넨 대체 누구인가?”

메피스토펠레스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죠.”

예전에는 그만큼 관람이 자유롭고 소박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얼굴이 후덕하게 생긴 독일인 남자 안내원이 나에게 손짓으로 의자에 앉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숙한 관람 분위기를 흔들고 싶어 한 그 안내원의 악마적(?)인 장난기가 지금 생각하면 그냥 장난기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괴테하우스의 직원이니 틀림없이 『파우스트』는 읽었을 테고, 거기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머감각을 체득했을 것이다.

유머는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제대로 구사될 수 있다. 한마디로 신의 전지적 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세상 이치를 꿰뚫을 수 있어야 빛나는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인간이 인식한 합리성만으로는 더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없게 한다. 유머와 기지에 능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에게서 버림받지 않는 마성적 존재로서,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의적 성격을 띤’ 존재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흉악한 악마의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생의 다른 이면(異面)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존재로서 바로 괴테 자신인 셈이다. 요컨대 파우스트의 자연신론적 창조력이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주장하는 니힐리즘도 괴테 자신의 속성에서 우러나온 괴테의 양면성이며, 그 역설적 이율배반이야 말로 인생의 참진리를 규명하려는 괴테 특유의 변증법적 조화 기법인 것이다. 일관된 합리성(정숙한 관람)만으로는 총체적 파악이 불가능하므로 반동적인 모순(의자에 앉힘)을 개입시켜 괴테를 온전히 느끼게 하려는 그 탁월한 안내자 덕택에 나는 괴테와 더욱 친숙해졌고(合), 그 바람에 괴테하우스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목상의 황실 고문관으로 부유한 법학자였고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로 천성이 활달하고 명랑했다. 8살 때 조부모에게 신년시를 써 보낼 만큼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친 괴테는 16살이 되자 라이프치히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지만 문학과 미술(판화)에 더 흥미를 갖게 된다. 2년 후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할 수밖에 없던 괴테는 다시 고향을 떠나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계속한다. 그때 눈병 치료차 그곳에 온 헤르더와 교류하며 문학과 언어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괴테보다 훨씬 연상인 헤르더는 독일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로 “성서 또한 시일 따름이며, 시 또한 성서”라는 유명한 말로 그의 문학관을 대변하는데, 그 바탕에는 인간의 신화(神化), 신의 인간화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 목사이면서도 일반 사회와 잘 어울린 헤르더는 신학과 문학을 혼융시키려 했고,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이념보다 살아 숨쉬는 감성본위를 중시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운동의 원리로 작용한다. 계몽주의가 만연하던 독일 문단에 프랑스 고전주의가 유입되면서 독일에는 공허한 형식미와 미사여구를 내세우는 풍조가 유행한다. 여기에 반동하여 독일적인 자유로운 생명력과 원시적인 인간 감정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데 그게 질풍노도 운동이다.

계몽주의적 세계관에 거부감을 느껴온 신세대 작가들은 자신의 절제 있는 규범의식마저 위선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연, 정렬, 천재성과 같은 때 묻지 않은 속성이야 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가장 새로운 가치였다. 실제로 이 시기의 젊은 문인들은 전통적인 예의나 관습에 서슴없이 반역했는데 그들은 헤어스타일이나 복장에서도 그들 나름의 독특한 행색을 꾸며냈다. 경건주의적 감정 억제, 합리주의적 질서 체계 같은 전통가치는 자연을 구가하고 독특한 개성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 무너지고 만다.

이제 시대정신은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로, 섭리적 질서에서 파괴적 카오스로 전환되어 갔고, 비극 역시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적 비극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물과 같은 성격적 비극으로 전환되었으며, 그런 변화의 핵심에는 괴테와 헤르더가 있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 것은 25살 때이다. 질풍노도 시기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전 유럽의 소년소녀들이 소위 베르테르 병에 걸려 새로운 유행을 퍼뜨릴 정도로 인기가 충천했다. 노란 조끼에 놋쇠단추가 달린 연미복은 물론 모방자살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나폴레옹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곱 번이나 탐독했고 이집트 정벌 중에는 말안장 위에 앉아 읽었다고 한다. 그 후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초토작전에 패하여 철군하는 와중에도 괴테에게 인사를 보낼 정도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의 가슴 아픈 체험이 소재로 작용한다. 22살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던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베슬러의 고등법원에서 견습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 그곳 법관인 부프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그 집 딸인 샤롯테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외교관인 케스트너와 약혼 중이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공사관 서기관인 예루살렘이 결혼한 샤롯테를 사랑하다 자살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괴테는 예루살렘과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자살한 권총이 샤롯테의 남편인 케스트너가 빌려준 총이어서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체험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티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종교적 도덕적 비난은 도외시하고라도, 작품으로서의 미숙함, 표현상의 조잡함과 병적 증상이 지적되었으나 오히려 그런 격렬한 생명성과 순수한 열정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융합되어 감동을 유발시킨 것이다. 베르테르에게 자연은 한계를 초월한 무한한 창조력과 생명력을 지닌 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자기 자신도 이 영원하고 신적인 자연의 일부라고 느꼈으며 여기에서 베르테르의 범신론적인 종교성을 읽을 수 있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아우구스트 공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떠난 것은 그의 나이 26살 때인 1775년이다. 당시에는 여러 공국의 대공들이 천하의 인재를 구하려고 도처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는데 유럽에서는 예술혁명, 철학혁명, 정치혁명,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괴테보다 10살이나 아래인 아우구스트 대공은 괴테를 통해 당시 인구 6000명인 바이마르를 독일 권역의 중심 국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괴테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아우구스트 공과 합심하여 독일 역사상 유례없는 문화적 융성을 이룩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후진국이던 독일이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듬해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되고부터 괴테는 정식으로 공국의 정사에 참여하는데, 그 무렵 궁정 여자 관리인 샤롯테 폰 슈타인 부인과 깊은 우정을 맺게 된다. 우아한 그녀의 품위와 정신은 괴테의 넘쳐흐르는 정열을 교묘히 다독거리면서 그의 재능을 발양시켜 주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괴테가 거친 질풍노도를 극복하여 높은 고전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현재 유럽의 문화수도이며 독일의 유서깊은 도시 바이마르는 괴테가 거주하는 기간에 문학과 예술인이 많았고, 그로 인해 18세기 후반 바이마르는 고전주의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를 거쳐간 인물만 해도 1772년 빌란트가 왕자의 가정교사로 부임해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으며, 1775년에는 괴테가 아우구스트 대공의 초빙을 받았고, 1776년에는 헤르더가 궁중 목사로 초빙되었다. 1799년부터는 실러가 바이마르에 정착하여 괴테와 고전주의 문학의 꽃을 피웠고, 1842년에는 리스트가 바이마르로 초빙되었으며, 1900년에는 니체가 바이마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1919년에는 ‘바우하우스’라는 건축의 새로운 조류가 탄생하여 미술과 건축, 공예 분야의 대가들이 바이마르에서 생활하게 됨으로써 바이마르의 진보와 자유 그리고 개방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괴테가 죽을 때까지 50여 년간 살았으며 그가 수집한 광물이나 도자기 같은 예술품이 보관된 괴테박물관은 매일 1,000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고전주의 여행’이라 할 만큼 괴테의 예술적 의식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내 뼈의 정수까지 변화된 것을 느낀다”고 말할 만큼 갖가지 체험과 고대 예술품 감상은 그에게 기대 이상의 충격을 주었으며, 바이마르에서 느꼈던 불안감이나 초조감도 말끔히 씻겨졌다. 귀국 후 자연과학에 심취할 정도로 마음도 예전처럼 맑아졌다.

이듬해 30세가 된 괴테는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이피게니에』를 완성한다.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원전 『타우리스인의 이피게니에』를 모방한 그 작품은 그리스 신화가 종교적 배경을 이룬다. 하지만 괴테는 단순한 모방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특성을 살린 독일적 심령극을 창조해낸 것이다. 여주인공 이피게니에의 정신적 변화에 중점을 둔 이 작품은 그녀가 신들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구현하는 인도주의 이념을 다룬다.

괴테가 크리스티아네와 실러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다. 크리스티아네와는 동거를 시작했고, 실러를 예나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추천해줬던 것이다. 실러는 괴테가 작품을 쓰도록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훗날 독일이 국립극장 앞에 두 사람의 동상을 나란히 세워줄 만큼 그들은 우의가 깊었고, 그런 우정은 독일 고전주의를 빛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실러와 경구 집 『크세니엔』의 공동 출간을 구상한 괴테는 실러가 죽자 “내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 같다”고 술회할 만큼 충격이 컸다.

1819년, 괴테는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의 『디반(Divan)』을 읽고 쓰기 시작한『서동시집』을 출간하는데 그 시집에는 괴테의 의식과 정서가 그리스의 합리적인 고전주의에서 신비스런 중근동의 종교성으로 바뀌게 된 실증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괴테가 청년시절에『빌헬름 마이스터 청년시대』를 구상하여 고령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된 『빌헬름 마이스터 편력시대』를 출간하는데, 거기에는 괴테의 모든 체험과 지성과 사상이 육화되어 있다.

괴테에 대해 쓰려면 그의 애정행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생동안 9명의 여성과 애정관계를 맺는다. 그 중 정식으로 결혼한 크리스티아네는 20년 가까이 동거한 여성으로 괴테를 정성껏 섬기고 그의 번족한 집안 살림을 도맡았으며, 프랑스 군인들의 횡포를 지혜롭게 대처하는 등 괴테에게는 은인 같은 존재였다. 그런 여자를 첩이니 식모니 하고 뒷말이 많아지자 괴테는 갑자기 결혼식을 올려버린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우구스트가 17살 때의 일이다.

괴테의 사랑은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에 다닐 때 식당 집 딸 케트헨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후 21살 때 사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와는 일년간 사랑하다 헤어졌으며,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6살인 쇠네만과는 약혼까지 했으면서도 결혼이란 굴레에 매이기가 두려워 3개월 만에 파혼한다. 슈타인 부인과의 10여 년에 걸친 관계 말고도, 예나에 머물 때 사귄 서점 주인의 양녀 민나,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의 양녀 마리안네가 있는데, 마리안네는 서정시인으로 괴테의 <서동시집>에도 실려 있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에 오른 이듬해에 아내 크리스티아네가 중병으로 사망한다. 그 후 74살이 된 괴테는 19살 된 올리케를 사랑하게 되고, 그 바람에 정열적인 연애시 『마리엔바트의 비가』가 태어난다. 여성을 진로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괴테, 하지만 그는 자기와 관계한 여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괴테가 72살이 되는 1823년에는 그를 숭배하는 에커만(Eckermann)이 찾아와 조수가 된다. 에커만은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평한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본성 속에 있는 지극히 고귀한 것을 나에게 열어놓았고, 내 정신은 그의 정신으로 인하여 불타올랐다. 우리 사이에는 깊은 공감이 오갔다. 그는 탁자 너머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에커만의 기록이다. 그는 괴테와 10년 동안 1000번 가까이 만났으며, 그때마다 대화를 기록해 두었다가 괴테 사후에 3권의 책으로 출간한다.

괴테는 죽음 직전까지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 아우구스트가 로마에서 사망하고,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시의 진실』과 『파우스트』 2부를 완성한다. 83살이 되는 1832년 3월 16일, 병이 재발한 괴테는 마지막 일기를 쓰고, 다음날에는 흄볼트에게 최후의 편지를 쓴다. 그리고 3월 22일 11시 반, 독일이 낳은 대문호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정치가, 교육자, 미술가, 자연과학자로도 평가 받는 괴테의 문학인생은 단순히 작품 창작에만 국한되지 않고 작품마다가 독일사회의 발전과 직결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그의 작가적 삶의 여정, 즉 그가 바이마르의 수련시대를 거쳐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헬레리즘, 기독교 정신을 종합하는 헤브라이즘, 그리고 계몽주의와 질풍노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온 그 숨가쁜 여정은, 괴테의 문학이 원숙해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독일 정신과 맞물린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루스는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윤리의식이 강하고 호전적이며 목가적인 독일민족은 비가시적인 신의 모습을 자연 자체로 여기며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믿었다고 했다. 이런 사상은 1770년대와 80년대에 스피노자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독일에 범신론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 괴테 역시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에 몰두하게 되고 범신론적 종교관을 지니게 된다.

괴테는 자연을 의지적인 우주로 인식했다. 인간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에서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봐왔지만 괴테가 범신론에서 받아들인 자연은 생명이 유한하고 감각할 수 있는 소산적 자연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력으로 모든 걸 창조하고 모든 거에 작용하는 능산적 자연, 즉 의지태인 것이다. 괴테는 그의 친구 야코비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을 “문학인으로서는 다신론자이며 자연 탐구자로서는 범신론자”라고 썼으며, 그의 잠언적인 글 『원리와 성찰』에서는 “자연은 항상 여호와이다. 지금도 그러하고, 그전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고 썼다.

하지만 신에 대한 확신은 지상에 사는 인간의 몫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그의 종교관은 기독교의 절대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단순한 자연신론에 경도된 것도 아니다. 요컨대 기독교의 유일신으로서의 여호와를 인정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자연임을 주장한다. “종교는 노인의 것이며, 문학은 젊은이의 종교” 라고 한 괴테의 발언은 이런 그의 양면성, 즉 기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거기에만 함몰되기 싫다는 강한 자의식을 드러낸 셈인데, 그것은 작가도 창조자이기에 지상의 신이 되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대욕망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괴테는 초월적인 기독교의 세계와 세속적인 예술의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왔으며, 그것은 거의 천부적이라고 할만한, 괴테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믿음 안에서의 연약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괴테에게 있어 예술은 자연의 이치가 감추고 있는 비의를 인간의 천재성이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의 신비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 현상이라면, 예술은 인간이 개입하여 그것을 이해한 미적 형상인 것이다. 이런 이원적 본성 때문에 괴테는 믿음을 소망하면서도 그거에 함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괴테는 심지어 기독교를 “좋지 않은 것”이라고 욕한 적도 있지만, 이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파우스트』를 비롯한 그의 후기 작품들은 모두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랄 수 있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일인의 성경이라고 극찬한 『파우스트』는 괴테가 24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무려 58년만인 183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원래 전설적 인물로 전래된 『파우스트』는 마술, 점성술, 신학, 의학에 능한 인물로 악마가 파우스트의 세속적이고 본능적인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 대가로 영혼을 넘겨받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게 줄거리였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리고 여러 작가들의 저술과 공연의 다양성에 따라 결국에는 유랑극으로까지 변천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괴테의 『파우스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제재와 소재로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되는데, 파우스트는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통해 우주의 신비와 인간세계의 구경적 이치를 터득하려고 적나라한 삶을 두루 체험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학문의 천착만으로는 그것들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낙담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자 그 악마와 쾌락적 삶을 보장받는 대신 영혼을 넘겨받기로 한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적 인간은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데, 신에 도전하는 악마야 말로 세상 구경을 안내할 가장 숙달된 가이드였던 것이다.

파우스트는 그렇다고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기대되는 욕구의 성취가 절대적인 성취라고 믿진 않는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그 무엇으로도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그처럼 어떠한 성취로도 충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욕구는 인간의 삶을 끝없는 추구의 도정으로 몰아갈 것이며, 그 욕구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인간은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계속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생각이다.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은 학자로서 여태껏 전혀 알지 못했던 세속적 삶을 철저히 체험해 보려는 강한 욕구 탓이었지만, 파우스트는 미래의 어떤 목표도 자신을 끝내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미래는 희망적인 미래가 아니라 예견된 절망이며, 그것은 또한 괴테적인 절망이기도 하다.

모든 생성된 사물은 궁국적으로 소멸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생성될 가치가 없다는 메피스토펠로스적 허무! 따라서 인간이 무엇을 창조해내든 결국은 시간 속에 묻히게 마련이니 어떤 노력이나 어떤 고통의 결과물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절망!

말하자면 파우스트의 절망은 운명적이고 보편적인 절망이요, 오직 절대자의 능력으로만이 해결 가능한 절망이다. 그래서 괴테는 신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그 캄캄한 절망을 안고 주인공 파우스트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마녀의 부엌에서 묘약을 마시고 젊은 청년으로 환원된 파우스트는 먼저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그레트헨에 접근하지만 그녀의 진실되고 고귀한 사랑에 감화되자 메페스토펠레스는 농간을 부려 그레트헨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머니와 아이를, 파우스트로 하여금 그레트헨의 오빠를 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죄책감에 빠진 파우스트를 발푸르기스의 밤의 환락으로 이끌어 도덕성을 마비시키려 하지만 타락의 와중에도 그레트헨에 대한 양심이 되살아난 파우스트는 그녀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직행하여 충만한 애정으로 감싸준다. 그리고 천상으로부터 “그녀는 구원받았노라!”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처럼 질풍노도적 격렬한 열정의 세계가 펼쳐지는 제1부가 끝나고, 제2부에서는 아주 절제된 지성미로 묘사되는 더 확대된 세계가 펼쳐진다.

파우스트는 궁성에서 파탄지경의 황제를 구해내고, 메피스트팔레스의 계략으로 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지만 환영에 불과했던 헬레나의 형상은 꿈처럼 소멸되고 파우스트의 팔에는 헬레나의 옷과 베일만이 걸쳐져 있다. 이제 악마와의 결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달은 파우스트는 만인의 복지를 위해 자신이 일궈낸 자유의 땅을 떠올리며 “오,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를 외치고 쓰러진다. 파우스트가 쓰러지자 그 순간을 노린 메피스토펠레스가 도깨비들과 함께 파우스트의 영혼을 챙기려 할 때, 속죄한 그레트헨의 사랑이 하늘의 은총을 받아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해낸다.

12111 시행으로 엮어진 『파우스트』는 의도된 각본이다. 그리고 그 예고된 진실을 실증할 매개체가 주인공 파우스트이며, 그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신이 되고자 했는데, 그런 파우스트가 바로 괴테 자신이었던 것이다. 괴테는 미래세계에서 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의 한계를 인식하고 영원한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의 종합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그 종합이 과연 가능할까? 괴테 문학에 있어서의 종교의 기능은 이런 질문 때문에 더욱 중요한데, 괴테는 하느님을 믿고 성경에서 친밀감이 느껴졌지만 실증적 신앙에는 소홀했다. 그는 교회에 가지도 않았고 기도도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존경심은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을 지닌 괴테는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에서도 중심인물의 성격을 변증법적인 융합 구도로 설정한다. 학자로서의 인간적인 욕망이 악마와의 결탁을 통해 구원의 세계로 지향(合一)되는 예정된 코스.『파우스트』를 다 쓰고 난 괴테는 “나의 일생은 이것이 끝이다”라고 휴지(休止)의 숨을 내쉰다. 평생 동안 다듬은 대작의 출산 뒤에는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몸은 재처럼 삭았으리라. 그 때문일까, 괴테는 『파우스트』 2부를 완성한 이듬해에 숨을 거둔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전 인생이 망라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괴테문학의 얼굴이어서 독일의 모든 정신 유산을 집대성한 작품이기도 하다. 게르만 민족 본래의 범신론적 신비주의, 그리스 문화의 신화적인 헬레니즘, 기독교 문화의 헤브라이즘이 고스란히 육화된 작품으로 그런 이질적인 문화 요소들의 조화는 지금도 독일 사회의 전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2년 반 동안 푸슈킨을 비롯하여 12명의 대문호에 대한 글을 연재하면서 이번이 가장 피곤했던 작업이라 가장 어수선한 글이 되고 말았다.(끝)

존 스타인벡과 <분노의 포도>

시카고에 있는 훼밍웨이의 집과 샐리나스에 있는 스타인벡의 집 중에서 어디를 먼저 찾아갈까 망서리다가 샐리나스로 방향을 잡았다. 보름 후면 닥쳐올 여름의 유혹 때문이었다. 유혹? 그렇다. 아름다운 유혹이 아니라 잔혹한 유혹에 홀린 것이다. “옥수수 잎에 갈색 줄이 퍼진”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이제 대지를 참혹하게 비틀 것이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땅. 가난과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땅. 내 의식 속에 심어진 캘리포니아의 평원은 그처럼 거칠고 황량했다. 고교시절에 읽은 『분노의 포도』가 캘리포니아의 이미지를 저주받은 땅으로 휘어놓은 것이다.

푸른 배추 농원을 가로질러온 버스가 샐리나스(Salinas) 시내에 진입하자 네거리 도로변에 깔끔한 2층 저택이 나타난다. 식당과 기념품 매장으로 활용되는 <STEINBECK HOUSE>였다. 집 주위를 둘러보고 기념관 쪽으로 걸어갔다. 전시관 입구에 앉아 있는 스타인벡의 전신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서재, 침실, 유품전시실, 영상실을 차례로 관람했다. 영화 세트장처럼 꾸며진 영상실에서는『에덴의 동쪽』이 방영되고 있었다. 제임스 딘의 전설적인 연기 장면이 스크린에 뜨는 순간 일시에 내 몸이 긴장한다. 수십 년 전에 본 영화인데도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은 아직도 내 의식 속에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왜 잊혀지지 않았을까? 내 실종된 청춘 탓일까? 활짝 펴보지 못한 꽃봉오리처럼 한순간도 원색감정(原色感情)에 젖어보지 못한 내 결핍(缺乏) 때문일까?

존 스타인벡이 남북전쟁에서 제1차세계대전까지를 시대배경으로 설정하고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중심주제로 다룬 소설 『에덴의 동쪽』은 작가 자신이 그동안의 작품을 습작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정도로 모든 지식과 열정을 동원한 역작이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 만큼 평단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작가의 외가를 모델로 삼은 헤밀튼 가의 목가적 이야기와 트래스크 가의 문제적인 픽션이 교직된 대하소설 『에덴의 동쪽』은 소설보다는 오히려 영화를 통해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이 예각적으로 선별하여 스스로 각색까지 맡은 영화 『에덴의 동쪽』은 구약성서의 카인과 아벨 형제의 이야기를 원형으로 삼았다. 인간의 영원한 사랑욕구를 주제로 설정한 이 영화는 배우 제임스 딘의 ‘우수 어린 반항적 인간상’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를 일약 신화적인 스타로 키운 기반이 된다. 제임스 딘의 우수 어린 반항은 만천하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여 그를 구애(求愛)의 심볼로 만들었던 것이다. 스타인벡도 제임스 딘의 의식세계에 친화를 느껴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제임스 딘이 교통사고로 죽자 세계 곳곳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죽음을 비관한 여자들이 집단 가출해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는 웃지못할 사태가 발생했고, 그의 무덤에는 그의 죽음을 의심하는 팬들의 편지가 답지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단명은 예고된 운명의 궤적인지도 모른다. 그는 “일찍 죽어서 아름다운 사랑을 남긴다”고 말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제임스 딘은 농장을 경영하는 아담의 두 쌍둥이 아들 중 작은아들 칼 역을 맡았는데, 큰아들 아론(리차드 타바로스 분)은 고분고분한 성격인데다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지만 칼은 반항아적인 기질이어서 아버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아버지가 아론을 편애할수록 칼의 성격은 점점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고, 드디어 아버지는 칼의 몸에 에미의 부정한 피가 흐를지 모른다고 의심하기에 이른다. 칼의 생모 캐시(가출 후의 이름)는 처녀시절 가출을 시도했다가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자 집에 불을 질러 부모를 죽게 했고, 성실한 아담을 유혹하여 아론과 칼을 낳고도 환락생활에 빠지고 싶어 가정을 파괴했으며, 가출을 막는 남편 아담에게 총상을 입히면서까지 집을 나와 창녀가 된 악마의 화신이다.

어느 날 칼은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 캐시가 청루(靑樓)의 마담 노릇을 하며 몸을 판다는 풍문을 듣고 아버지 몰래 찾아갔다가 생모의 타락한 생활이 확인되자 혐오감을 느낀다. 그런 칼의 찢겨진 영혼을 형 아론의 애인 에이브라가 감싸주는데 격정적이면서도 인간성이 고운 칼에게 마음이 끌린 에이브라는 아론만 편애하는 아버지에게 칼의 효심을 이해하라고 간청한다. 배추 운송업 실패로 파산지경에 이른 아버지를 위해 칼은 (어머니한테서 빌린) 5천 달러로 콩을 매점하여 큰 돈을 벌게 되고, 그 돈을 아버지에게 생일선물로 바치지만 아버지는 전쟁(제1차세계대전)을 이용한 불경한 돈이라고 칼의 선물을 끝내 거절한다.

마음에 감당 못할 상처를 입은 칼은 형 아론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동안 정숙한 어머니상을 간직해온 아론은 어머니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자포자기에 빠져 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하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큰아들의 전사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죄의식을 느낀 칼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결국 칼이 집을 나가기로 작정하자 에이브라는 아버지에게 거듭 칼을 사랑하라고 간청한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별 인사차 찾아온 칼에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간호원 대신 네가 간호해주렴.”

소설에서는 에이브라 대신 중국인 집사(執事) 리이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병상에 누워 숨을 거둬가는 아담에게 칼을 용서하라고 애소하는 리이의 마지막 대화가 감동적이다.

“그를 받아주세요. 당신의 아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를 망가뜨려선 안 됩니다. 그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아담, 입술을 움직일 수 있어요? 입술 모양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세요.”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인 훼밍웨이 보다 한발 늦게 등단한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새로운 세기가 열리는 1902년 2월 27일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샐리나스에서 태어났다. 독일계의 혈통을 받은 아버지 스타인벡은 모터리구(區)의 재무책임자였으며 아일랜드계의 혈통을 받은 어머니 올리브 해밀튼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존 스타인벡은 두 누이를 둔 외아들로서 맞벌이 부부인 부모를 도와 고교시절부터 농장일을 맡아했다. 그는 성경 말고도 밀튼, 도스토예프스키, 조지 엘리어트, 토마스 하디의 작품을 탐독했다.

스탠포드대학에 입학한 그는 영문학을 선택했지만 나중에 사회학과 생물학을 공부했으며 1925년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대학을 중퇴했다. 그해 스타인벡은 도시를 선호하는 빅붐(Big Boom)이 일자 사람들이 모여드는 뉴욕에서 문필생활로 자립할 계획을 세운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우선 <아메리칸>이라는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후 리포터로 활동하면서 단편집 편집을 맡아봤지만 관념적인 이야기밖에 쓰지 못한 탓에 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때부터 스타인벡의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벽돌을 운반하는 인부생활로부터 페인트 견습공, 과수원 노동자, 별장지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외딴 섬 타호의 별장지기가 되고서야 조용히 습작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쓴 작품이 처녀작 『황금의 잔』으로 서인도의 스페인 영해를 휩쓸고 다닌 해적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스타인벡이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5년에 파이자노(paisano)의 애환을 그린 『토틸라 마을』을 출간하고부터이다. 토르티야 평원에 사는 스페인인, 멕시코인, 인디언 등의 혼혈인종인 파이자노들의 순박하고도 자유로운 생활상을 페이소스와 유머를 섞어 그린 작품으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거기에는 미국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는데 파이자노들을 “웃음과 친절과 정직한 욕정과 똑바른 눈을 지닌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한 것으로 보아 스타인벡은 원시적인 소박한 것에서 향수를 느끼는 작가로 여겨진다.

1936년 과수원 노동자의 파업을 다룬 『의심스러운 싸움』이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면, 그의 인기를 치솟게 한 작품은 1937년 가난한 떠돌이 노동자들의 비극과 우정을 그린 『생쥐와 인간』이다. 그리고 1938년 그의 소년시절을 다룬 단편집 『긴 골짜기』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앙드레 지드는 15편의 단편이 수록된 그 소설집을 읽고 체홉의 걸작과 맞먹는 작품들이 들어있다고 격찬했다.

미국의 대공항(大恐慌)이 불러온 자본주의 경제체제 붕괴는 민주주의의 패배를 의미한 반면 파시즘의 흥륭을 예고했다. 미국 노동인구중 3분의 1인 천망명이 실직하여 굶주리게 되자 1932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즈벨트는 경제부흥과 사회보장증진을 최우선시한 뉴딜정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불황과 생활난은 일반대중에게 사회의식을 눈뜨게 했고, 사회 비리에 민감한 작가들은 개인의 내면세계 탐구보다 사회와 경제 문제에 더 관심을 쏟았는데, 자연주의적 색체를 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모더니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작가가 존 스타인벡이다.

불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에는 미국의 모든 작가 시인들이 좌경한 시기여서 저명한 작가들도 미국작가회의와 작가동맹 같은 조직에 소속하여 사회활동을 했으며 스타인벡도 미국작가회의의 멤버였다. 그 당시에는 빵과 파업과 빈민굴을 제재로 하는 많은 프로문학이 나왔지만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의 농원에 관심을 두는 바람에 『분노의 포도』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미국 상업주의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사회 모순에 도전한 스타인벡이지만 그는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인 위치에서 거리를 두고 작품을 써왔으며,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거듭할 정도로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해적 따위를 등장시킨 역사적 로맨스 물을, 제2차대전 중에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전쟁소설을, 만년에는 멕시코인을 다룬 신비주의적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박력 있는 역동성으로 독자를 긴장시켜 읽히는 힘을 준다. 대표작인 <분노의 포도>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도 생동하는 인물들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인데, 비정할 정도로 자기 감정과의 거리유지에 철저했던 그의 문체가 작품의 극적효과를 증폭시키는 데에 기여했음은 당연하다. 울고 싸우고 죽이면서도 웃고 서로 돕는 인간미 넘치는 빈민의 애환을 녹이는 데에는 주관적 사변(思辨)의 억제만큼 효과적인 묘사 수단이 없는 것이다. 그는 작중인물의 심리를 일체 거절했으며 펜카메라(Pen-Camera)식 순수 행동묘사 기법만을 동원함으로써 작품의 신뢰도를 부각시켰다.

『분노의 포도』가 발표되자 그 제재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성묘사를 그대로 허용해도 좋을지 그 문제를 둘러싸고 문학관계자는 물론 저널리스트, 종교인, 정치가, 교사를 중심으로 논의가 분분했다. 작품을 비난하는 소리가 더 컸으며, 불결한 책이라고 낙인을 찍은 도서관이 많았고, 특히 오크라호마주와 캘리포니아주의 지방신문에서는 작품 공격이 더 심했다. 오크라호마 출신 상원의원은 의회에까지 이 문제를 들고나와 논란을 일으키고 목소리를 높여 매도했다.

『분노의 포도』는 마가레트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다음으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0년에는 퓨리처상을 받았으며 영화로도 성공하여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스타인벡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에도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하층민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1937년 극심한 가뭄으로 농토를 떠나야 했던 오크라호마 소작인들, 소위 오키즈(OKiES)의 삶을 다루고 있다. 특히 30년대 미국의 대가뭄, 자연농의 토지 상실, 은행과 대지주들의 횡포, 이주민들의 기아와 저임금노동, 캘리포니아인들의 적대적 행위 등을 비중 있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 당시 사회현실을 묘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 조드(Joad) 가족의 삶을 통해 가정은 무너져도 가정의 구성 요소들은 더 큰 집단으로 조합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은 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스타인벡이 작중인물을 통해 원형적 요소를 성공적으로 담아낸 작품 중 하나이며 구성(plot)면에서도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5개의 홀수장과 15개의 짝수장 중에서 홀수장은 모두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조건과 같은 이야기의 배경을 압축해서 추상적으로 서술하는 일종의 중간장(inter-chapter) 역할을 한다.

스타인벡은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에서 탈피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쓴다. 1943년에는 뉴욕 헤럴드트리뷴지의 특파원이 되어 수송선으로 영국을 비롯한 북아프리카 기지를 방문하고 남이탈리아 상륙전에도 참가하여 현장을 상세히 보도한다. 그후 월남전이 한창일 때는 소련 시인 예프트센코와 월남전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몸소 최전선을 둘러본다. 스타인벡은 그의 삶이 그러하듯 가정생활에도 굴곡이 많았다. 1942년에는 12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 캐럴 해닝과 이혼하고 배우 그윈 버든과 재혼했으며, 7년 후인 1950년에는 일레인 스코트와 세 번째로 결혼한다.

그는 스코트와 결혼하자마자 창작 무대였던 고향을 떠나 뉴욕 맨해튼으로 이주해 살면서 그동안 구상해온 소설 『샐리나스의 계곡』을 완성, 2년 뒤 『에덴의 동쪽』으로 이름을 바꿔 발표한다. 1961년에는 도덕규범의 붕괴가 초래한 소시민사회의 문제를 다룬 <불만의 겨울>을 발표하여 이듬해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스타인벡은 66년의 길지 않은 생을 살았으면서도 사망할 때까지 집필생활을 계속하여 평론집『미국과 미국인』을 출간할 정도로 문학인생을 성실히 경영해왔다. 1968년 12월 20일 뉴욕 자택에서 눈을 감은지 6년만인 1974년,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샐리나스에는 72회 생일을 맞아 훌륭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미국문학에 있어 세대간의 차별성을 논할 때 20년대 작가와 30년대 작가 사이에는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20년대 작가가 제1차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인간의 악마성에 회의를 느껴온 데다, 미국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에 식상한 나머지 허무와 염세에 함몰되어 귀국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방황해야 했던 길 잃은 세대인데 반해, 30년대 작가는 애정의 회복이나 낙관주의 등 보다 적극적인 삶을 지향한 세대라고 볼 수 있겠는데 좌경화 경향이나 빈민층에 대한 연민의식도 그런 적극성의 반향이라 하겠다.

대공항의 절정기에 출간된 『분노의 포도』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원형으로 삼았으며 애급을 오크라호마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캘리포니아로 대입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젊은 톰 조드의 모습은 바로 모세의 상징적 모습이랄 수 있겠는데 조드 일가의 이야기도 다른 각도로 확대해석하면 미국 전체의 비극을 상징한 셈이 된다.

『분노의 포도』는 그 시대의 프로 이념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스타인벡은 이념에 앞서 사회와 인간 개개의 생동하는 모습을 그리려 했다. 톰이 어머니에게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재배한 곡식을 먹고 자기들이 지은 집에서 살 때 저도 물론 거기에 같이 있을 거에요.”라고 한 말도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작자는 작품의 원형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조드 가(家)의 둘째 아들인 톰은 댄스홀에서 취한 상태로 싸움을 벌이다가 상대가 칼로 찌르자 순식간에 옆에 있는 삽으로 상대를 쳐서 살인죄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4년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가족을 만나 기뻐할 틈도 없이 멀고 먼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야 했다. 오크라호마의 소작인들이 흉년으로 소작료를 내지 못하자 은행들이 트랙터로 땅을 갈아 엎어버리는 바람에 빈농들은 속수무책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미시시피에서 럭키산맥을 거쳐 베이커스 필드로 뻗은 국도에는 톰과 같은 빈농들의 긴 이주 행렬이 이어졌다. 미리 이주해 온 사람들로부터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든 데다, 온갖 푸대접을 받으며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절망적인 소식만 듣게 된다. 하지만 이주민들은 서로 불신의 벽을 깨고 모두 하나로 뭉쳐 노약자와 아이는 공동으로 보호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서로 협동하여 극복하는데, 거기에는 톰이 노동판에서 만나 알게 된 케이시의 역할이 컸다. 한때는 전도사였으나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사회개량주의자가 된 케이시는 암암리에 파업노동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는 톰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나는 예수처럼 황야에 나가 뭔가를 찾아내려고 한 적이 있어. 때로는 그걸 찾아낼 뻔도 했지. 그런데 감옥에 갔더니 바로 거기에 있더군."

감옥에서 찾은 진실한 가치. 케이시의 행동기제(行動機制)는 바로 그 약자에 대한 페이소스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점점 실천적 인간형으로 개량되어가던 톰은 케이시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자 또 살인을 저지르고 말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분노의 포도』에서의 압권은 태아를 사산한 로저샨(톰의 여동생)이 엿새 동안 굶어서 죽어가는 한 남자에게 젖을 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중심주제가 무엇인지를 암시해주는 이 장면은 절망의 심연에서 더 높고 너른 세계, 공동체 의식으로만 국한할 수 없는, 보다 장엄한 이상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상세계는 인간이 어떤 고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본능적인 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로저샨은 천천히 구석 쪽으로 걸어가서 쓰러져 있는 얼굴과 그의 멍청하게 뜬 놀란 눈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에 누웠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로저샨은 덧이불의 한쪽을 풀고 자기의 젖가슴을 드러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그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의 상체를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헛간 위쪽과 건너 쪽을 바라보았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스타인벡의 명성은 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로부터 얻어졌지만 그의 작가적 위대성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정으로 사랑한 그의 휴머니즘에 있다 하겠다. 1945년에 발표한 『통조림 공장가』에 실린 그의 서문이 이를 증명한다.

“어떤 사나이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그곳 주민은 창녀, 뚜쟁이, 노름꾼, 불량배들이다. 그것이 전부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나이가 다른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성자, 천사, 순교자, 한없이 착한 사람들이라고.” (끝)

톨스토이즘과 <부활>

“만일 박테리아가 인간의 손톱을 관찰하고 연구한다면 인간을 무기물로 보았을 게 틀림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지구 표면을 무기물로만 인식해 왔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톨스토이의 3대 명작 중 하나인 『부활』에서 작중인물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가 한 말이다. 혁명가인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생물까지 포함하여 모두 생명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이해부족일 뿐 사실은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톨스토이 사상의 기조가 되기도 한다.

세계적인 문호이며 위대한 사상가요 도덕가인 톨스토이의 정신세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맥이 흐르고 있다. 한 줄기는 지상세계의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세계를 지향하는 고고한 성자적 생활이다. 그러니 톨스토이의 생은 이 두 세계의 싸움의 역사였고, 종국에는 후자의 승리로 끝났기에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톨스토이의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처음 가본 것은 1989년 겨울로 아직 소련 연방체제가 유지되던 시기였다. 그 후 러시아를 몇 차례 다녀왔지만 야스나야 폴랴나에는 2005년 여름에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길가의 대문 모습도 그대로였고 마당가의 개집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기념관 내부가 새롭게 단장된 데다 전시실마다 직원들이 지키고 있어 예전의 소박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규모가 잡혔다는 말은 그만큼 규제가 심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입구 현관에는 예전과 비슷한 장소에 톨스토이가 타던 자전거가 놓여 있고 구두는 진열장 속에 들어 있었다. 소파 등 거실에 있던 가구는 위치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고, 서재의 책상이나 침실의 침대는 그대로인데 화분들이 놓여 있어 세련된 분위기가 돋보였다. 개방 후 러시아 국민의 정서변화나 생활향상의 기미를 엿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기념관에서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아내 소피야의 옷장이었다.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 털목도리, 검정모자가 새삼 관심을 끌었다. 저런 차림으로 나드리하고 황제도 알현했겠지. 나는 그 옷을 보며 16세의 어린 나이로 34세의 노총각 톨스토이에게 시집와 6남 2녀의 자식을 낳아 키운 소피아의 아줌마상을 그려보았다.

그들 가정은 결혼 초에만 행복했을 뿐 평생 의견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웅대하고 과격한 개성에 소피야의 지적이면서도 모성적인 주부형이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생활에 충실하고 남편의 작품원고를 헌신적으로 정서(淨書)해온 소피야가 까다롭고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남편의 원시적인 성격에서 이질감이 느껴진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톨스토이의 야수성에 가까운 성욕과 소피야의 성적 불감증이 마찰을 빚기가 십상이었다.

그에게는 사랑의 육욕적인 면이 너무 강하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왜냐면 나와는 전혀 상반되기 때문이다.

소피야가 결혼 초인 1863년 4월 29일에 쓴 일기다. 그녀는 남편의 관능적 정렬의 폭발성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만큼, 갑작스레 재산을 모두 버리고 성서적인 청빈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남편의 그 회심(回心)을 위선으로 여겼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나의 신앙』을 통해 ‘가난해야 한다. 걸인이 돼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이것 없이는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1885년 12월 드디어 톨스토이는 소피야와 이혼할 결심을 하게 되지만 막상 소피야가 짐을 챙기자 마음을 바꾼다. 소피야 역시 이질적인 남편과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짐을 싸지만 애들이 울며 매달리자 도로 짐을 풀고 만다. 다음은 소피야가 동생 타치아나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내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난폭한 말을 퍼붓기도 한다. 그런 짓은 사사건건마다 행해지고 더욱 심해진다. 그래도 나는 참으려고 애썼지만 마침내 그가 “네 주위의 공기까지도 병독(病毒)으로 오염돼 있다.”고 나를 헐뜯었을 때는 트렁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울면서 들어오고, 그가 나가지 말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기념관을 나와 정원 멀리에 있는 톨스토이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넓은 자카스 정원 숲 속에 외롭게 누워 있는 무덤에는 그의 유언대로 아무 장식이 없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허물고 농노들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온 톨스토이의 인간애가 생의 종착지인 무덤에까지 번져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나는 그가 농노들에게 분배해주려 한 농토가 어디쯤일지를 가늠하려고 숲 저쪽을 눈여겨보았다. 1909년 10월, 유언장이 공개되자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셋째 아들 안드레이는 마을 거리를 쏴다니며 개들에게 총질을 했다. 개를 죽이진 않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분풀이였다. 둘째 아들 레프도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톨스토이는 “그 애가 이젠 나를 증오하고 있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아내 소피야 역시 유언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처럼 가정을 등지면서까지 톨스토이가 추구한 세계는 무엇일까? 불멸의 예술적 형상미, 국가사회의 모순과 악에 맞선 기독교적 아나키즘, 공상적인 사색이 아닌 육체로 일궈낸 실천적인 이성(理性), 그것들을 생산해낸 톨스토이의 의식 저변에는 도대체 무엇이 깔려있을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밝은 숲속의 빈 땅’이란 뜻을 지닌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궁정 전의(典醫)의 딸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타야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생후 1년 6개월일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산고로 죽고, 9살 때는 아버지가 뇌일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고아가 된다. 5남매 모두가 큰고모인 알렉산드라 백작부인에게 부양되지만 13살 때는 큰고모마저 죽는 바람에 작은고모의 보호를 받는다.

16살인 1844년에 형제들과 카잔으로 떠나 카잔대학 철학부 동양어학과(아랍․터키어)에 입학한 톨스토이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향락에 빠지는 바람에 2학기 진급 시험에서 낙방하고 이듬해 법학대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 무렵 룻소의 저서에 빠져든 그는 심적 갈등으로 교회와 기도생활을 그만둔다. 19살 때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긴 기록생활이 이어진다. 학교도 끝을 내지 못한 채 자퇴서를 제출하고 맏형 니콜라이와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와 새로운 농사관리와 농민생활의 개선에 힘스지만 실패하여 환멸을 느낀다. 이듬해 모스크바로 나가 무위도식하며 술과 여자와 도박으로 시간을 보낸 그는 다음해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학사 검정고시를 치러 민법과 형법과목을 통과하지만 여전히 향락에 빠져 지낸다.

1851년에는 맏형 니콜라이를 따라 카프카즈로 떠나 카프카즈 포병여단의 사관후보생(귀족 하사관) 시험에 합격 4급 포병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처녀작 『유년시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시대인>주간이며 대시인인 네크라소프에게서 『유년시대』에 대한 호평을 받고 <동시대인>9월호에 발표하게 된다.

25살이 되는 1853년에는 장편『소년시절』과 단편『크리스마스 날 밤> 등을 쓰다가 도나우군 소위보가 되어 크림전쟁에 참여한다. 삼 년 후 러시아와 터키가 화평을 체결하자 제대하고 곧바로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와 농노의 굴레를 벗겨주려고 농민해방을 시도한다. 제대 이듬해 유럽 여행에 나선 톨스토이는 파리에서 길로틴에 의한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법은 참으로 터무니없다. 국가란 착취하고 시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고 기록한다.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농사에 힘쓰며 『청년시대』등을 발표하고 러시아 어문학 애호협회에도 가입한다. 또 농민학교를 개설하여 농민의 아이들에게 야학 교육을 시켰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유럽여행을 떠나 베를린대학에서는 몇 차례 청강도 하고, 영국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교육 강연을 듣기도 한다. 드레스텐에서는 『미메시스』의 저자인 아우어바흐와 만난 후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 교육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행한다.

34살이 되는 1862년에는 18세 연하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고 학교사업을 중단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2개월쯤 지날 때인 11월23일자 소피야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민중들과 그사람, 내겐 역겹기만 하다. 이 집안의 안주인인 내가 정말 안주인인지 아니면 톨스토이가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하는 민중이 주인인지 모르겠다.

1863년에는 중편『카자흐 사람들』을 발표하고, 장편『전쟁과 평화』를 쓰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는데, 현장성을 살리려고 모스크바로 가서 보로지노의 옛 싸움터를 답사하고 첫 단행본을 낸다. 그 무렵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으며『국민교육론』을 발표하고『초등교과서』재판을 낸다. 2년 후에는 ‘러시아 통보’지에 『전쟁과 평화』 1.2부에 해당되는 장편 『1805』를 팔표하고 그 후 계속『전쟁과 평화』를 집필한다. 47세 때인 1875년에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안나 카레니나』를 ‘러시아 통보’지에 게재하기 시작하고, 투르게네프의 서문이 실린『두 경기병』을 프랑스 <르 땅>지에 발표한다.

1881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음을 받는다.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들이다. 그들의 다른 점은 도스토예프스키는 타인을 설정하여 자신의 사상과 주제를 형상화했지만 사실주의자인 톨스토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인물을 내세웠던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서의 안드레이와 피에르,『안나 카레니나』에서의 레핀,『부활』에서의 레흘류도프 등은 바로 톨스토이 자신인 셈이다.

1883년에는 투르게네프가 사망하는데, 그는 사망 직전 톨스토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순수예술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지만 톨스토이는 끝내 예술을 위한 예술로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 다투며 지내온 사이지만 투르게네프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섰다.

“톨스토이는 좀 기이한 인물로 나는 그런 사람을 이제까지 만나본 적이 없어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이랄까, 아니 이 모든 점이 다 섞여 있어요. 어딘지 루소를 연상시키지만 룻소보다 정직하다고 해야겠지요. 룻소는 아주 도덕적인 인물이었지만 정말 호감가지 않는 존재였어요.”

1885년에는 민화(民話) 시리즈의 시효가 된『일리아스』를 발표하고, 말(馬) 이야기인 중편『홀스토메로』를 발표하는데『홀스토메로』는 훗날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주자인 쉬클로프스키가 주창한 ‘낯설게하기’의 텍스트가 된다.

또 그해에는 단편 『촟불』과 『두 노인』을 비롯하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신은 진리를 알고 있지만 곧 말하지는 않는다』『카프카즈의 포로』등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작권을 아내 소유로 돌리고 나서, 가정과 처자를 버리고 순례자 복장으로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의 고행길’을 떠난다. 1889년에는 『고골리론』을 비롯하여 『악마』『크로이체르 소나타』『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등을 쓰며 대표작 『부활』구상에 들어간다. 그해 흉작이 들자 톨스토이는 1881년 이후의 모든 저작권을 포기하고 피해지를 돌아본다. 아내 소피아도 ‘러시아신보’에 빈민구제를 호소하는 글『굶주림에 우는 농민구제의 방법에 대하여』를 발표, 여러 외국신문에 연재되는 바람에 남편 사업에도 보탬이 된다.

71세가 되는 1899년에는 ‘니빠’ 지에 『부활』을 발표한다. 그 무렵 아카데미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고 체홉, 고리키와 자주 어울렸으며 희곡 『산송장』을 쓴다. 이듬해에는 정부의 어용기관인 ‘종무원“이 톨스토이를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하자 <파문의 명령에 대하여 종무원에 보내는 회답>을 쓴다. 그리고 니콜라이 대공을 만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릴 ‘토지 사유제 철폐 호소문’을 전달한다.

1906년에는『인생독본』을 출간하고 국민에 부치는 공개장인『러시아 혁명의 의의』를 발표하자 톨스토이 작품 압수 선풍이 일어난다. 80세가 되는 이듬해에 페테르부르크에서 톨스토이 축하제 거행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조직된다. 톨스토이가 축하제 중지를 요청하지만 세계 각처에서 톨스토이 탄생 80주년 기념 축하제가 거행되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톨스토이 박람회가 성대히 거행된다. 야스나야 폴랴나에는 농부 옷을 입은 늙은 사상가를 보기 위해 국적과 계층을 초월한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그는 이미 선지자를 방불케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집필에 매달렸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10년에만 해도 82세의 노구로 2월에 단편『호딘카』를 집필하고, 3월에는 희곡『모든 것의 근원』을 완성하고, 단편 『뜻밖에』를 탈고하고, 7월22일에는 최후로 정식 유언장을 작성하고, 8,9월에는 『세상에 죄인은 없다』를 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새벽에는 아내 소피아에게 최후의 쪽지를 적어놓고 의사 마코베츠키이를 데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의 정든 집을 뒤로한 채 ‘전 인류와의 사랑의 길’을 떠난다. 10월 29일에는 3일 전부터 써온 최후의 저술인 논문 『유효한 수단』을 탈고하고, 10월 31일에는 여행 도중 병이 위중해져 랴자니-우랄철도 중간에 있는 아스타포보 시골 간이역에 내려 역장 오졸린의 집에 머물게 된다. 아스타포보에 모여든 의사들은 모두 폐렴이라고 진단했다.

그럼 여기에서 톨스토이가 숨을 거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전야와도 같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엿보기로 하겠는데, 이처럼 톨스토이 문학은 반전통주의적 전위세력이 팽배한 시기에 꽃을 피웠던 것이다.

톨스토이가 역장의 집에 눕게 되자 온 세계가 그의 가출과 병세에 관심을 기울였다. 기자들은 역 간이식당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웅성거렸고 여기저기 전보를 치느라 바빴다. 세계의 눈과 귀가 아스타포보 역에 집중되었고, 기차마저 이 역을 지나칠 때는 경적을 죽이고 서행하는 형편이었다.

아내 소피야는 특별열차 편으로 아스타포보에 도착했지만 남편을 접견하지 못하고 열차 안에 머물다가 나중에야 남편 곁에 갈 수 있었다. 11월 4일 밤, 톨스토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샤! 마샤!” 하고 소리쳤다. 마샤는 1906년에 죽은 사랑하던 딸 마리야였다. 맏아들 세르게이는 『과거의 기록』에서 11월 6일 저녁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아버지는 “난 어디로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 날 그냥 내버려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톨스토이가 도망치자고 외친 그 무의식 속의 비의는 무엇일까? 그는 11월 7일 오전 6시 5분 눈을 감았다. 큰 별이 떨어졌다. 개인의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외친 큰 별. 선(善)이 인생의 목적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외친 큰 별.

아침에 역장 오졸린의 집 대문이 열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참나무 관이 전나무 가지로 장식된 화물열차로 운구되었다. 11월 8일 1시 15분, 톨스토이의 관을 실은 객차 한 량과 25명의 신문기자들을 태운 추가 객차가 특별열차 편에 연결되었다. 모스크바에는 검은 리본을 단 조기 게양이 금지되고 경찰들은 꽃가게를 감시하며 화환에 쓰이는 리본에 무슨 글이 적혀나가는지 확인했다. 철도역에도 감시가 강화되었다. 수천 명이 몰려들었지만 모스크바에서 특별열차를 편성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야스나야 폴랴나에는 5천 명 이상의 학생과 농민과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영구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도착하자 거기에 임시 경찰대기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아들 세르게이가 만류해서 경찰 간부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장례식도 연설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 2시 반, 아들과 친구들은 관을 들어 농민들에게 인도했다. 농민들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그대는 그대를 잃은 야스나야 폴랴나 농민들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라고 쓴 흰 만장을 자작나무에 달았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그가 생전에 묻히고 싶어 한 자카스 숲 속으로 정해졌다. 땅은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학생이었던 포카노프가 팠다. 군중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관이 무덤 속으로 내려가자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도 무릎을 꿇어라!”

톨스토이의 대표작 중에서도 『부활』은 그의 정신세계가 가장 완숙한 때에 씌여진 작품이다. 자신의 창작에 회의를 느꼈던 그 유명한 ‘정신적 위기’ 이후의 집필이기 때문이다. 50대 나이인 1880년대에 정신적 위기를 겪었던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가적 삶에 회의를 느꼈으며 신학이나 철학상의 본질적인 화두에 천착하고, 순박한 민중과의 접촉을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았던 것이다. 작품도 이른바 톨스토이즘의 기초를 이루는 교화적인 사상을 담았는데 『고백』『독단적 신학비판』『나의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인생에 대하여』 등과 같은 작품이 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이 그가 주장한 중심주제는 선을 지향한 삶이었으며,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온갖 문화 문명 과학 예술의 폐기, 국가와 그것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 거부, 특히 국가를 인정한 교회에 대한 기피 즉 무교회주의였다. 그는 모든 전통과 신비주의가 제거된 합리화된 기독교 신앙을 주창했다. “예수는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행위를 금했고 사제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장황한 말과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금하고 누구나 혼자 기도하기를 가르쳤고, 교회 자체를 금했을 뿐더러, 자기는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진리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같이 교회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다음은 소설『어머니』의 저자인 고리키가 『레프 톨스토이, 기록들』에 적은 글이다.

톨스토이가 내게 읽어보라고 건네준 일기책에서 나는 이상한 잠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신은 나의 욕망이다.’ 오늘 일기책을 돌려주며 나는 그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생각이네....”

틀림없이 신이란 그(신)를 인식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니, 그게 아니고....”

그는 웃으면서 일기책을 둘둘 말아 상의의 커다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톨스토이가 53세 때인 1881년은 그의 생애에서 분수령과도 같은 대전환을 맞이한 해였다. 그전의 생이 옛 귀족가문에 속한 삶이었다면 그 후는 종교적으로 거듭나야 했던 전 인류에 대한 애정과 배려의 삶이었다. 이전의 생애가 목가적 신화적 개인적이었다면 이후의 생애는 이성적 합리적 박애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그는 개인의 구원을 부정하고 복음서들의 도덕적 가르침에 따랐다.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포함하여 그전의 작품들은 모두 본능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여겼으며 미적쾌락을 부정했다. 종교도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를 위한 행복추구였으며, 진정한 예술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연대감에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감동을 주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형태로 수용되는 영향은 배격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작품을 써야 했다. 교화적 논문집인 『참회록』을 비롯하여 『나의 신앙』『인생론』『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썼고, 숭고한 정신세계를 담은 대작 『부활』을 쓰게 되는데, 『부활』은 국가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장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쓰게 된 것은 1880년대 말에 우연히 코니라는 법률가로부터 형사피의사건을 듣고부터이다. 핀란드의 어느 별장지기 딸인 로잘리아(16세)라는 소녀가 그곳 지주의 아들로 대학을 갓 나온 청년의 유혹을 받고 몸을 더럽혀서 주인집을 쫓겨났는데, 그녀는 매춘부로 타락하고 각가지 전락의 길을 밟는 동안에 살인모의와 절도혐의까지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과도 유사했다. 언젠가 톨스토이는 제자인 비류코프에게 그가 대학시절과 페테르부르크 시절의 방종한 생활과 결혼 전에 저지른 두 가지 죄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영지의 농민의 딸과 관계한 일로 소설 『악마』에 암시되었고 다른 하나는 숙모 집의 마샤라는 순진한 하녀와 관계한 일로 그녀는 타락하여 인생을 망치게 되었다. 톨스토이가 마샤에게 어떤 속죄를 했는진 모르지만 『부활』에서의 레흘류도프가 톨스토이의 상징적인 인물이랄 수 있겠다.

톨스토이는 로잘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소설을 쓰려 했으나 그가 소설 창작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때라 포기하고 말았지만 1895년 카프카스 지방에 ‘두호보르 교주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출간을 서두르게 된다. 두호보르는 18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에 발생한 종파로서 원시기독교의 교의를 엄수하고, 철저한 무저항주의와 동포주의를 실천하는 한편, 신의 왕국만을 인정하며 국가, 법률, 병역의무 등 지상의 모든 권위와 법규를 부정하려는 종교적 집단이었다. 톨스토이즘의 교의를 그대로 실천하려는 그들에게 정부는 모진 박해를 가했고, 1895년에는 카자흐 병을 시켜 천여 명을 학살했다. 그래도 굽히지 않자 국외 추방령을 내렸고, 톨스토이는 그들의 캐나다 이주비를 대주기 위해 『부활』을 썼던 것이다. 이처럼 『부활』집필에는 톨스토이의 인도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부활』에서 사회 밑바닥에 숨어 있는 무서운 비리와 죄악들을 파헤쳐 그 원인이 불완전한 사회조직과 불합리한 비판제도에 있다고 보고, 권력자와 부자에게 유리한 법률과 경제조직, 허위의식적인 종교와 도덕관이 얼마나 건실한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간사회에 편재해 있는 그 병폐의 치유책으로 ‘인간이 인간을 비판하고 벌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로망 롤랑이 “이 작품은 시대 양심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한 것도 그런 화두를 전제한 경구라 하겠다.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온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과 절도 피의자로 재판을 받는 카추샤(마슬로바)를 만난다.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고모네 저택 하녀였던 것이다. 젖먹이 때부터 고모가 귀엽게 키운 여자라 하녀이면서 아씨 대접도 받을 만큼 정숙하게 자랄 수 있었다. 카추샤가 16세일 때 대학생이던 부유한 네흘류도프 공작이 고모네를 찾아왔다가 그녀를 보게 되고, 그 후 2년이 지나 공작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 나흘 동안 그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 그녀를 유혹했던 것이며, 떠난 후로는 그녀를 잊어왔던 것이다. 네흘류도프와 헤어지고 5개월이 지나서야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카추샤는 고모네 저택을 나와 거친 세파에 시달리게 된다. 이집 저집을 전전하다가 종국에는 창녀생활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러다가 손님의 돈을 훔치고 죽였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쓴다.

네흘류도프는 뒤늦게야 자기 때문에 참혹한 수형의 길을 걷게 된 카추샤를 위해 귀족생활마저 포기하고 우선 그녀를 석방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또 카추샤를 면회하러 감옥에 다니며 실정을 알게 된 다른 죄수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려고 유력자들을 찾아다니지만, 부패하고 경박한 귀족사회와 관료주의의 행패를 보면서 차츰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의식화되어간다. 헐벗은 농노들의 고역으로 호의호식하면서도 그들을 무시하는 귀족들의 위선에 혐오감이 느껴지고 토지사유제에까지 회의를 품게 되자 카추샤에 대한 죄의식은 더욱 깊어만 간다. 네흘류도프는 그 죄의식을 탕감받기 위해 카추샤에게 청혼하지만 그녀는 술에 취해 일부러 위악적인 태도를 보인다. 네흘류도프의 자비에 부담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토록 보고 싶고 목숨처럼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막상 퇴락의 정점에서 베푸는 그 자비를 결혼이란 형식으로 일상화 시킬 수는 없었다.

드디어 그녀는 같은 죄수로 유형지까지 합류해온 혁명가 이바노비치에게 마음을 할애한다. 이바노비치는 카추샤와 동일한 죄수 입장에서 그녀의 진실된 현재모습만을 그대로 사랑한 남자이며, 죄의식 때문에 카추샤를 동행한 레흘류도프의 도덕적인 의무항과는 다른 애정이었다. 카추샤를 임신시켜 타락의 길을 걷게 하고 결국에는 죄수로 전락시킨 그 죄의식 때문에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동행한 레흘류도프의 참회와는 순수성부터가 달랐다.

『부활』에도 작법상의 미흡이 있는 건 사실이다. 70세에 쓴 작가가 30대 중반의 젊은 인물을 묘사하자니 객관적인 리얼리티가 결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의 종결부분을 복음서의 나열로 처리한 것이 형태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하지만 『부활』은 인간 고뇌와 톨스토이 정신이 가장 숙성된 작품이다. 톨스토이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로망 롤랑도『부활』에서 ‘유독 톨스토이의 가장 맑고,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날카롭고 엷은 회색의 눈동자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신을 보는 눈길을 느끼게 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톨스토이는 그런 하자에 대해 “긴 인생을 살아온 나 같은 노인이 작품을 쓰면서 사람들이 잊어온 복음서의 구절을 한번 회상시켜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라고 변명한다. 사실 그는 그의 이상세계인 지상낙원(신의 왕국) 건설의 해답을 작품 에필로그를 장식한 마태복음 5장과 18장 중에서 찾았으며 어떤 악이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말라‘는 산상설교를 철저히 믿음으로써 그의 중심사상인 ‘무저항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었다.

『부활』에서 양심이 마비된 재판관, 부패한 관리, 허식에 빠진 상류귀족사회의 리얼한 묘사,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망각한 채 정부의 추악한 주구로 타락한 정교회에 대한 풍자야 말로『부활』을 새로운 러시아를 예언하는 예언서로 격상시켰다. 톨스토이는 레닌의 말처럼 농노 소유자들에 의해 짓밟힌 러시아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천재적으로 조명해냈다. 다음은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후 밝힌 회신이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으며,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으로 여긴다. 나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에 있으며, 신의 의지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끝)

살아있는 성격책 『레 미제라블』

세상에서 가장 잘 읽히는 소설 『레 미제라블』. 한번 손에 들면 놓기 싫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작품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역시 감동 어린 작품이다.

<살아 있는 성경책>이라고 불리는 『레 미제라블』은 인류사회가 간직할 수 있는 가장 견고한 학대받는 민중의 옹호서이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의 이 소설은 "단테는 공상으로 지옥을 그렸지만 나는 현실로 지옥을 그리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근대가 향유한 위대한 서사시이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이 발표될 당시에는 찬사와 비평으로 엇갈렸다. 심지어는 신문에서 "빅토르 위고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 미제라블』의 진짜 작가는 악마다" 라고 떠들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만약 허락한다면 교회당의 강단에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30년 동안 구상하고 반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작으로, "무지와 비참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한 아마 이 소설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쓴 유명한 서문처럼 독자에게 영원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위고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한 주인공이 한 주교의 자비심을 통해 교화되어, 감당 못할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극한적인 선행을 베풀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잠시나마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작가 자신의 사상을 이상화한 『레 미제라블』은 인도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파란만장한 서사시적 작품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폐해를 제거하여 불행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주려는 목적에서 씌어진 이 작품에는 사회악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위고의 눈으로 보면 작중인물 모두가 가여운 존재들이다. 장 발장은 물론, 현실성이 결여될 만큼 냉혹하고 완고한 자베르 경감, 모성애의 화신처럼 그려진 팡틴느, 인두겁을 쓴 악의 화신인 테나르디에 역시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사회 정화 차원에서 씌어지기 시작한 『레 미제라블』은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완성된 작품인데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변화와 사회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장발장의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지만 전쟁, 혁명, 이데올로기, 문예사조, 그리고 사랑과 우정, 신뢰와 배신으로 점철된 이 대서사시를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상 19세기는 격랑의 시대였다. 세 차례의 혁명과 3번의 공화체제, 다시 돌아온 왕정복고와 2번의 제정 등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1789년 프랑스에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주의의 시발이 되는 공화제가 수립되지만 절대군주제에서 자유․평등․박애가 보장되는 이상사회가 확립되려면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 혼란기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나타난 지도자가 나폴레옹이다. 그는 국론을 통일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공화제를 간섭하는 외적을 물리치고도,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 패배로 몰락의 길을 걷다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만다. 다시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어 루이 18세와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의 통치가 이어지지만 이미 공화정을 통하여 자유평등을 체험한 시민들은 그들의 독단을 좌시하지 않고 1830년 다시 혁명(7월혁명)을 일으킨다.

그런 정치적 혼란은 사회적 수난으로 이어졌으며 급변하는 사회상은 당연히 문학작품의 제재가 될 수밖에 없고,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파괴를 욕망하는 새로운 사조를 촉진시키기 십상이었다. 요컨대 종래의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낭만주의의 태동이 예고되었다는 말이다.

그후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는 낭만주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정 붕괴 후 샤롤 10세가 외국으로 망명하자 뒤를 이어 소위 ‘국민의 왕’으로 추대된 루이 필립은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서약하고 진보적 인물을 대거 등용했던 것이다. 왕당파에 호의적이던 위고도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로 기울어 가난한 자들과 비참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을 옹호하는 작품을 연달아 발표한다. 『가을의 나뭇잎』같은 시집을 비롯하여 『황혼의 노래』, 『마음의 소리』,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희곡 『마리옹 드 로름』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인이 된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파리 중심가 가까이에 있는 마레 지구를 찾아갔다. 유태인이 대다수인 이곳 좁다란 프랑 부르주아 길가에는 동성애자, 카페, 레스토랑, 뷰티크, 아트, 갤러리, 골동품, 서점 등 상점들이 즐비하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인 보주광장은 마레와 바스티유 사이에 있었다. 16세기 중반부터 국왕들이 시테 섬의 왕궁에서 이 일대로 거처를 옮기면서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아도 건물들의 규모나 분위기로 보아 옛 파리 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남북의 중앙에는 왕과 왕비가 살던 저택이 있고, 리슐리외 추기경등 당대의 실력가들이 거주하면서 이곳은 파리 최고의 부촌이 되었다. 정방형의 아름다운 보주광장을 에두르고 있는 붉은 집들. 한 면에 9채씩 총 36개의 건물들 중에서 우선 위고의 집을 찾아본다. 그가 16년 동안 살았던 이곳 보주광장 6번지의 집은 그가 망명생활하던 건지 섬(Guernesey Islands)의 오트빌 하우스와 함께 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자 프랑스 최대의 낭만파 시인이며 정치가인 빅톨 위고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기 2년 전인 1802년에 프랑스 동부 도시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 출신이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코르시카, 이탈리아, 에스파냐를 전전하며 살았으나 부모의 불화로 10세 때부터는 어머니와 형제들과만 파리로 돌아와 살았다.

아버지는 위고가 군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이미 14세의 소년으로 자란 아들은 “샤토브리앙이 되든가 그렇잖으면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일기에 쓸 정도로 일찍이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15살 때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 경시대회에서 입상하고, 17살 때는 투르즈의 아카데미 콩구르 시 부분에서 상을 받은 위고는 18세 때에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창시자인 샤토브리앙과 교류를 갖는다. 20세 때인 1822년에는 첫 시집 『오드』를 발표함으로써 루이 18세로부터 하사금을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아델 푸세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1833년 부인이 친구 생트 뵈브와 추문을 일으키자 크게 상심하던 위고는 여배우 줄리에트 들루에와 열애에 빠진다.

위고가 희곡 『크롬웰』을 출간한 것은 25세 때이다. 『크롬웰』에 붙여진 긴 서문은 고전파의 극작법을 공격한 낭만주의 선언서로 유명한데, 위고는 고전주의를 비판하면서 고전극(古典劇)에서 눈물과 웃음, 숭고와 괴기미(그로테스크)가 뒤섞인 모순적인 조화야말로 극의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했다. 고전파의 이른바 삼일치(三一致: 때․장소․줄거리)의 법칙 중에서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너무 구차한 구속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이원성(二元性)을 모티브로 삼은 이 서문은 간행 당시 청년작가들에게 성서와 같은 텍스트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는 드라마이다. 드라마의 성격은 현실적이란 데에 있다, 현실적인 것은 숭고와 기괴의 두 유형이 아주 자유롭게 결합함으로써 성립된다.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이 삶과 우주 삼라만상에서 교차되듯 드라마에서도 그것들은 서로 엇갈려 나타난다. 그 이유는 참된 시, 완벽한 시는 상반된 것들의 조화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고가 낭만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은 1830년에 발표한 희곡 『에르나니』의 상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와 낭만파 간의 싸움이 계기가 된다. 위고는 학생, 문학청년, 무명 화가, 그리고 네르발, 고티에 등의 젊고 전투적인 시인들을 동원하여 투쟁에서 승리하고, 뒤마, 발자크, 생트 뵈브, 고티에 등과 함께 일종의 낭만파 문인 클럽인 세나클(Cenacle)을 만들어 활약한다. 1837년에는 자작 작위와 도뇌르 4등 훈장을 받았으며 1841년에는 소망해온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된다.

그처럼 문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히자 정치에 뜻을 둔 위고는 1843년에 상연된 희곡 <뷔르그라브(성주들)>가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데다 장녀 레오폴딘이 남편과 함께 세느강에서 익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약 10년간 아예 문필활동을 중단하고 정치에만 관여한다. 그는 여러 차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지만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이 물러나자 공화주의자가 되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구데타를 일으켜 황제(나폴레옹 3세)에 오르자 제정에 반대하여 망명길에 오른다. 처음에는 브뤼셀에 머물다가 영불해협에 위치한 영국령 건지 섬에 정착하는데 그런 망명생활은 그동안 정치활동으로 등한시해온 창작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건지 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 3세를 야유하는 『징벌시집(懲罰詩集)』과 죽은 딸에 대한 추억과 철학사상을 쓴 『정관시집(靜觀詩集)』을 출간한다. 그리고 23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레 미제라블』10권을 완간하고, 걸작품 『테오필 고티에에게 바치는 조시(弔詩)』와 에세이 『윌리엄 셰익스피어』등을 발표한다. 위고에게 망명지인 건지 섬은 상처의 땅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는 그곳 생활이 가장 생산적인 황금기였으며,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도 그 시기에 집필되었다.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날씨가 밝고 온화한 그곳에서 위고는 천국 같은 환상을 느끼며 명작을 쏟아냈던 것이다. 르누아르 같은 화가들이 건지 섬에 머문 것도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그 환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건지 섬의 세인트 피터포트에 있는 위고의 집 오트빌 하우스에는 지금도 관광객이 줄을 이어 찾아들고 있다. 위고가 온갖 정성을 쏟아온 오트빌 하우스는 현재 파리시로 소유권이 넘어가 국립박물관으로 변신했으며 주기적으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넓은 정원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그 전망 좋은 집에서 위고는 15년 동안 집필에 빠져지냈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보들레르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서도 위고의 건지 섬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자네 집이 자네의 낭만적 영혼을 반영할 만큼 고상하고 시적이라고 들었네. 사람들이 자네가 바람과 파도의 울부짖음 속에서도 맘 편히 지낸다고 하더군.”

위고의 낭만주의 정신은 그 바위 언덕 위의 고독한 환경에서 무르익었을 것이다.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떼 지어 몰려다니는 구름에 매료되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이 거대한 바다의 꿈속에 살며 점점 더 이 바다에 사로잡힌 몽유병자가 되어가고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과 푸르게 생동하는 이 광활한 바다 앞에서, 나는 그저 신의 증인이 될 뿐이다.”

위고의 회상이다. 이처럼 단절된 삶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며 자신의 명성을 관리해 나갔다. 1859년에는 나폴레옹 3세가 특별 사면령을 내렸지만 그는 정면으로 거부한다. 위고는 이런 글을 쓴다. “나는 폭풍새다. 점점 더 구름과 물보라와 폭풍을 갈망하게 된다. 나는 이제 온종일 도시에서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 이곳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테니까.”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못했다. 딸이 파리 근교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데다 아내마저 두 아들과 지내기 위해 브뤼셀로 떠났기 때문이다. 건지 섬에 홀로 남겨진 위고는 오랜 애인인 줄리에트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줄리에트는 아예 위고의 이웃집으로 이사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창문을 통해 위고를 바라보곤 했다. 그들은 함께 섬을 뒤지고 다니며 작은 조각상, 거울, 기와, 카펫, 그림, 램프 등 여러가지 골동품을 구입하며 지냈다.

위고는 오트빌 하우스에서 집필에 열중하면서도 경찰의 눈을 피해 민중저항운동을 조직하여 샤를 정권에 저항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샤를)가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몰락한 후에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망명지에서 돌아온 위고는 다시 정치에 관여하여 좌파 상원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지만 ‘파리코뮌’과 같은 동족상잔에 실망한 나머지 서서히 정치에서 물러선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18일부터 5월 28일까지 72일 동안 파리에 수립된 혁명 정권으로,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소시민 노동자로 형성된 국민군이 대의원을 선출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했으나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정부군과의 대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어쨌든 평등사회의 염원은 프랑스 사회에도 서서히 녹아들어 어느덧 학교에서도 탈종교가 허용되고 자유에 대한 공화주의 대법안이 선포된다. 위고는 집필을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지만 플로베르, 졸라 등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낭만주의 시대와 함께 위고의 시대도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의 선두주자로 떠올랐으며 그의 대표작인 『보봐리 부인』은 지금도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로베르는 누구보다 문체를 중요시한 소설가였다. 그의 글은 완벽하게 짜여졌으며 이런완벽성은 문체를 통하여 가능했다. 그는 단순한 현실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관찰, 실험, 분석을 통하여, 감상을 배제한 채 실제처럼 그렸던 것이다. 그의 이런 문체의식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플로베르 문체의 특징은 '자유간접화법'이다. 그 화법은 서술자가 작중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관성을 은연중에 들어내면서 동시에 서술자가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효과를 준다. 요컨대 서술자가 전지적 입장에서 인물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주관을 드러내주는 화법이므로 서술자의 주관 개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문장론을 강의할 때마다 플로베르의 문체 리듬성과 ‘표현일어설’을 희화시켜 강조하는데, 플로베르는 자기가 쓴 원고를 큰 소리로 낭독함으로써 문장의 리듬을 살렸던 것이다. 문장의 리듬은 비문(非文)을 없애고 아름답고 선명한 음악성을 띠게 하여 읽히는 힘을 줌으로써 의미전달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어느 한 문장에는 그 문장을 낯설게 구조화(예술화)시킬 어휘나 낱말이 끼게 마련이어서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국어사전을 뒤지고, 그래도 찾지 못하면 언어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서라도 꼭 그 어휘와 낱말을 찾아내라고 우스갯소리를 서슴치않는다.

『레 미제라블』은 내용이 풍부하고 인도주의적인 요소와 서사시적인 영감으로 감동을 유발시키는 방대한 소설로 출간 당시 찬반의 거센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위고 필생의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거의가 지나치게 정형화 되어 있어 장 발장, 자베르, 팡틴느, 테나르디에 등은 규격화된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작가들이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일반 대중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다음은 귀에 익숙한 동시대 문인들의 반응이다.

“부정확하고 저속한 문체” (플로베르)

“추하고 하찮은 책” (보들레르)

“거짓투성이” (공쿠르 형제)

이런 반응과는 다르게 당대의 낭만파 시인인 라마르틴은 다음과 같이 함축적인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두 가지 방식으로 매우 위험한 책이다. 행복한 사람들을 너무 두렵게 할뿐더러 불행한 사람들에게 너무 희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이런 반응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주머니에 12프랑만 있으면 이 책을 샀고, 제비를 뽑아 읽고 난 뒤 책 주인을 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공장 노동자들은 돈을 갹출하여 책을 구입할 정도였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유발시킨 요인은 원리를 추구하는 논리나 사회적인 규범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고 인간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연민과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비열한 당시 사회의 비리와 기계적인 법률 해석 등 정의롭지 못한 사회 풍속을 가차없이 폭로한 데에 있다 하겠다..

1815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해질녘 디뉴의 거리에 사십대 중반의 건장하면서도 거지꼴처럼 초라한 사내가 나타난다. 배고픈 어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투옥되어 19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감한 장 발장이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그는 자애로운 주교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깨끗한 침실에서 잠을 자게 된다. 그런데 여섯 벌의 은식기와 두 개의 은촛대를 보고 탐내던 그는 결국 은식기를 훔쳐 야반도주한다. 이튿날 아침에 헌병대장의 부하들에게 멱살을 잡힌 채 주교의 집에 끌려가지만, 주교는 자기가 준 그릇이라고 둘러댄 다음 은촛대마저 가져가라고 내다준다. 장 발장은 눈을 크게 뜨고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듯한 표정’으로 이 거룩한 주교를 바라본다.

그 후 몽페르메유의 화제 현장에서 헌병대장의 두 아이를 구출하여 지역에서 신임을 얻기 시작한 장 발장은 그 지역의 특산품인 흑옥 제조기술로 경제를 살려 시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한편 남편에게 배신당한 팡틴느는 마들렌느(장 발장)의 공장에 취직하려고 어린 딸 코제트를 여관 주인인 테나르디에한테 맡기는데, 악질 테나르디에는 코제트를 볼모로 착하고 가련한 여인 팡틴느를 착취하기 시작한다. 딸을 구출하려다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폐까지 앓게 된 팡틴느는 억울한 일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그 사정을 알게 된 시장 마들렌느(장 발장)는 자베르 형사에게 석방을 명령하고 팡틴느를 돌봐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600프랑을 지불하고 코제트를 빼내오려 할 무렵 시장 마들렌느에게 뜻밖의 불운이 닥쳐온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자베르가 시장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뒤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장 발장은 8년 전부터 수배 중이던 전과자 장 발장이 잡혔다는 말을 듣는다. 고민 끝에 장발장은 자수하고 다시 징역살이에 들어간다. 하지만 장 발장은 코제트의 양육을 위해 창녀로 전락한 팡틴느를 구하려고 감옥을 탈주한 후, 여관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는 코제트를 빼내어 파리로 숨어든다.

세월이 지나 요조숙녀로 성장한 코제트는 마리우스라고 하는 청년의 사랑을 받지만 장발장은 압축되는 자베르의 추적을 피하려고 영국으로 도주할 궁리를 한다. 그때 마침 파리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우스는 혁명군에 가담한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의 양심과 용맹성에 감탄하여 함께 전장에 참여한다.

자베르는 전장에서도 여전히 장 발장의 뒤를 밟는다. 그러다가 왕당파 간첩으로 몰려 죽게될 처지에 놓인 자베르는 장 발장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된다. 여기에서 악마와도 같은 차디찬 피를 가진 자베르 형사의 고뇌가 독자의 가슴을 친다. 자기를 살려준 장 발장을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인간적인 양심을 느끼고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기 직전 자베는 이렇게 독백한다.

악인(장 발장) 덕택으로 목숨을 건진 대신 그 빚을 은혜로 갚는다. (악인이) “가보시오.”라고 한 말에 (나는) “자유방면이다.”라는 말로 갚는다. 개인적인 동기 때문에 의무를 희생한다? 자기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회를 배반한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재판소, 판결, 경찰, 권위 말고도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단 말인가?

자베르는 자신의 심경변화를 타락이라고 여겼고,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싫어졌다. 그래서 타락한 자신을 죽이려고 강물에 투신한 것이다.

한편 장 발장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업고 탈출에 성공, 마리우스를 귀족이며 왕당파인 외할아버지에게 인도한다. 이에 감격한 노인은 외손자인 마리우스와 장발장이 딸처럼 키운 코제트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하지만 악마와도 같은 테나르디에의 음모로 마리우스는 장 발장을 오해하게 된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아내 코제트를 데리고 병원에 누워 있는 장 발장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외친다. 장 발장은 예전에 미리엘 주교가 준 두 개의 은촛대를 사랑하는 그들에게 건네주며 "세상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끈질기게 자베르의 추적을 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온 장 발장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데, 죽음 직전에야 잠시 행복감에 젖어본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중요 등장인물은 실재 모델을 보고 설정된 경우가 많다.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인 미리엘 주교의 모델은 1806년부터 디뉴의 주교직에 있었던 미요리스인데, 그는 자애로운 덕행으로 신부와 신자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흠모를 받았다.

장 발장의 모델로는 피에르 모랑이라는 전과자가 있었다. 그는 1801년에 포르칼키에의 거리에서 빵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투옥된 인물이다. 모랑은 5년 형을 받고 형기를 마친 후에 석방된 후 미요리스 주교를 찾아가 대접을 받았는데 그 또한 장 발장의 행적과 비슷하다. 장 발장이란 인물에 픽션이 가해진 것은 복역 중 4번 탈옥을 시도하다 14년의 형이 불어난 부분이다. 그런데 작품 속 19년의 형기는 위고가 망명생활한 기간과 일치하여 19년이란 기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닌가 싶다.

굶주림이란 극단적인 상황에서 저지른 시시한 범죄 때문에 19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면서 한 영혼이 몰락하는 안타까운 시대적 상황을 고발한 『레 미제라블』, 이 불후의 명작은 사회를 올바른 정의 사회로 구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법과 질서가 때로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뭉갤 수도 있다는 값진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어두운 질곡에서 광명을 찾아가는 장 발장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인도주의적인 세계관과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상주의 사회를 꿈꿔온 위고의 생활과 사상은 웅대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다른 낭만파 시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상적인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는 주조(主潮)가 될 수 없다.

1885년 5월 22일, 위고가 83세로 숨을 거두자 조국 프랑스는 그를 대시인으로 추앙하여 국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날자를 6월 1일로 잡는다. 그의 운구는 200만 명의 애도 속에 가난한 자들이 이끄는 운구차에 실려 팡테옹으로 향했다. (끝)

살아있는 성격책 『레 미제라블』

세상에서 가장 잘 읽히는 소설 『레 미제라블』. 한번 손에 들면 놓기 싫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작품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역시 감동 어린 작품이다.

<살아 있는 성경책>이라고 불리는 『레 미제라블』은 인류사회가 간직할 수 있는 가장 견고한 학대받는 민중의 옹호서이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의 이 소설은 "단테는 공상으로 지옥을 그렸지만 나는 현실로 지옥을 그리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근대가 향유한 위대한 서사시이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이 발표될 당시에는 찬사와 비평으로 엇갈렸다. 심지어는 신문에서 "빅토르 위고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 미제라블』의 진짜 작가는 악마다" 라고 떠들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만약 허락한다면 교회당의 강단에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30년 동안 구상하고 반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작으로, "무지와 비참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한 아마 이 소설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쓴 유명한 서문처럼 독자에게 영원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위고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한 주인공이 한 주교의 자비심을 통해 교화되어, 감당 못할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극한적인 선행을 베풀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잠시나마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작가 자신의 사상을 이상화한 『레 미제라블』은 인도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파란만장한 서사시적 작품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폐해를 제거하여 불행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주려는 목적에서 씌어진 이 작품에는 사회악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위고의 눈으로 보면 작중인물 모두가 가여운 존재들이다. 장 발장은 물론, 현실성이 결여될 만큼 냉혹하고 완고한 자베르 경감, 모성애의 화신처럼 그려진 팡틴느, 인두겁을 쓴 악의 화신인 테나르디에 역시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사회 정화 차원에서 씌어지기 시작한 『레 미제라블』은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완성된 작품인데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변화와 사회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장발장의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지만 전쟁, 혁명, 이데올로기, 문예사조, 그리고 사랑과 우정, 신뢰와 배신으로 점철된 이 대서사시를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상 19세기는 격랑의 시대였다. 세 차례의 혁명과 3번의 공화체제, 다시 돌아온 왕정복고와 2번의 제정 등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1789년 프랑스에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주의의 시발이 되는 공화제가 수립되지만 절대군주제에서 자유․평등․박애가 보장되는 이상사회가 확립되려면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 혼란기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나타난 지도자가 나폴레옹이다. 그는 국론을 통일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공화제를 간섭하는 외적을 물리치고도,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 패배로 몰락의 길을 걷다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만다. 다시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어 루이 18세와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의 통치가 이어지지만 이미 공화정을 통하여 자유평등을 체험한 시민들은 그들의 독단을 좌시하지 않고 1830년 다시 혁명(7월혁명)을 일으킨다.

그런 정치적 혼란은 사회적 수난으로 이어졌으며 급변하는 사회상은 당연히 문학작품의 제재가 될 수밖에 없고,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파괴를 욕망하는 새로운 사조를 촉진시키기 십상이었다. 요컨대 종래의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낭만주의의 태동이 예고되었다는 말이다.

그후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는 낭만주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정 붕괴 후 샤롤 10세가 외국으로 망명하자 뒤를 이어 소위 ‘국민의 왕’으로 추대된 루이 필립은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서약하고 진보적 인물을 대거 등용했던 것이다. 왕당파에 호의적이던 위고도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로 기울어 가난한 자들과 비참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을 옹호하는 작품을 연달아 발표한다. 『가을의 나뭇잎』 같은 시집을 비롯하여 『황혼의 노래』, 『마음의 소리』,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희곡 『마리옹 드 로름』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인이 된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파리 중심가 가까이에 있는 마레 지구를 찾아갔다. 유태인이 대다수인 이곳 좁다란 프랑 부르주아 길가에는 동성애자, 카페, 레스토랑, 뷰티크, 아트, 갤러리, 골동품, 서점 등 상점들이 즐비하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인 보주광장은 마레와 바스티유 사이에 있었다. 16세기 중반부터 국왕들이 시테 섬의 왕궁에서 이 일대로 거처를 옮기면서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아도 건물들의 규모나 분위기로 보아 옛 파리 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남북의 중앙에는 왕과 왕비가 살던 저택이 있고, 리슐리외 추기경등 당대의 실력가들이 거주하면서 이곳은 파리 최고의 부촌이 되었다. 정방형의 아름다운 보주광장을 에두르고 있는 붉은 집들. 한 면에 9채씩 총 36개의 건물들 중에서 우선 위고의 집을 찾아본다. 그가 16년 동안 살았던 이곳 보주광장 6번지의 집은 그가 망명생활하던 건지 섬(Guernesey Islands)의 오트빌 하우스와 함께 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자 프랑스 최대의 낭만파 시인이며 정치가인 빅톨 위고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기 2년 전인 1802년에 프랑스 동부 도시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 출신이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코르시카, 이탈리아, 에스파냐를 전전하며 살았으나 부모의 불화로 10세 때부터는 어머니와 형제들과만 파리로 돌아와 살았다.

아버지는 위고가 군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이미 14세의 소년으로 자란 아들은 “샤토브리앙이 되든가 그렇잖으면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일기에 쓸 정도로 일찍이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15살 때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 경시대회에서 입상하고, 17살 때는 투르즈의 아카데미 콩구르 시 부분에서 상을 받은 위고는 18세 때에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창시자인 샤토브리앙과 교류를 갖는다. 20세 때인 1822년에는 첫 시집 『오드』를 발표함으로써 루이 18세로부터 하사금을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아델 푸세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1833년 부인이 친구 생트 뵈브와 추문을 일으키자 크게 상심하던 위고는 여배우 줄리에트 들루에와 열애에 빠진다.

위고가 희곡 『크롬웰』을 출간한 것은 25세 때이다. 『크롬웰』 붙여진 긴 서문은 고전파의 극작법을 공격한 낭만주의 선언서로 유명한데, 위고는 고전주의를 비판하면서 고전극(古典劇)에서 눈물과 웃음, 숭고와 괴기미(그로테스크)가 뒤섞인 모순적인 조화야말로 극의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했다. 고전파의 이른바 삼일치(三一致: 때․장소․줄거리)의 법칙 중에서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너무 구차한 구속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이원성(二元性)을 모티브로 삼은 이 서문은 간행 당시 청년작가들에게 성서와 같은 텍스트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는 드라마이다. 드라마의 성격은 현실적이란 데에 있다, 현실적인 것은 숭고와 기괴의 두 유형이 아주 자유롭게 결합함으로써 성립된다.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이 삶과 우주 삼라만상에서 교차되듯 드라마에서도 그것들은 서로 엇갈려 나타난다. 그 이유는 참된 시, 완벽한 시는 상반된 것들의 조화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고가 낭만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은 1830년에 발표한 희곡 <에르나니>의 상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와 낭만파 간의 싸움이 계기가 된다. 위고는 학생, 문학청년, 무명 화가, 그리고 네르발, 고티에 등의 젊고 전투적인 시인들을 동원하여 투쟁에서 승리하고, 뒤마, 발자크, 생트 뵈브, 고티에 등과 함께 일종의 낭만파 문인 클럽인 세나클(Cenacle)을 만들어 활약한다. 1837년에는 자작 작위와 도뇌르 4등 훈장을 받았으며 1841년에는 소망해온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된다.

그처럼 문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히자 정치에 뜻을 둔 위고는 1843년에 상연된 희곡 <뷔르그라브(성주들)>가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데다 장녀 레오폴딘이 남편과 함께 세느강에서 익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약 10년간 아예 문필활동을 중단하고 정치에만 관여한다. 그는 여러 차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지만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이 물러나자 공화주의자가 되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구데타를 일으켜 황제(나폴레옹 3세)에 오르자 제정에 반대하여 망명길에 오른다. 처음에는 브뤼셀에 머물다가 영불해협에 위치한 영국령 건지 섬에 정착하는데 그런 망명생활은 그동안 정치활동으로 등한시해온 창작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건지 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 3세를 야유하는 『징벌시집(懲罰詩集)』과 죽은 딸에 대한 추억과 철학사상을 쓴 『정관시집(靜觀詩集)』을 출간한다. 그리고 23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레 미제라블』10권을 완간하고, 걸작품 『테오필 고티에에게 바치는 조시(弔詩)』와 에세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을 발표한다. 위고에게 망명지인 건지 섬은 상처의 땅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는 그곳 생활이 가장 생산적인 황금기였으며,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도 그 시기에 집필되었다.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날씨가 밝고 온화한 그곳에서 위고는 천국 같은 환상을 느끼며 명작을 쏟아냈던 것이다. 르누아르 같은 화가들이 건지 섬에 머문 것도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그 환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건지 섬의 세인트 피터포트에 있는 위고의 집 오트빌 하우스에는 지금도 관광객이 줄을 이어 찾아들고 있다. 위고가 온갖 정성을 쏟아온 오트빌 하우스는 현재 파리시로 소유권이 넘어가 국립박물관으로 변신했으며 주기적으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넓은 정원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그 전망 좋은 집에서 위고는 15년 동안 집필에 빠져지냈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보들레르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서도 위고의 건지 섬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자네 집이 자네의 낭만적 영혼을 반영할 만큼 고상하고 시적이라고 들었네. 사람들이 자네가 바람과 파도의 울부짖음 속에서도 맘 편히 지낸다고 하더군.”

위고의 낭만주의 정신은 그 바위 언덕 위의 고독한 환경에서 무르익었을 것이다.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떼 지어 몰려다니는 구름에 매료되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이 거대한 바다의 꿈속에 살며 점점 더 이 바다에 사로잡힌 몽유병자가 되어가고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과 푸르게 생동하는 이 광활한 바다 앞에서, 나는 그저 신의 증인이 될 뿐이다.”

위고의 회상이다. 이처럼 단절된 삶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며 자신의 명성을 관리해 나갔다. 1859년에는 나폴레옹 3세가 특별 사면령을 내렸지만 그는 정면으로 거부한다. 위고는 이런 글을 쓴다. “나는 폭풍새다. 점점 더 구름과 물보라와 폭풍을 갈망하게 된다. 나는 이제 온종일 도시에서 지내기 어려울 것 같다. 이곳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테니까.”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못했다. 딸이 파리 근교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데다 아내마저 두 아들과 지내기 위해 브뤼셀로 떠났기 때문이다. 건지 섬에 홀로 남겨진 위고는 오랜 애인인 줄리에트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줄리에트는 아예 위고의 이웃집으로 이사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창문을 통해 위고를 바라보곤 했다. 그들은 함께 섬을 뒤지고 다니며 작은 조각상, 거울, 기와, 카펫, 그림, 램프 등 여러가지 골동품을 구입하며 지냈다.

위고는 오트빌 하우스에서 집필에 열중하면서도 경찰의 눈을 피해 민중저항운동을 조직하여 샤를 정권에 저항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샤를)가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몰락한 후에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망명지에서 돌아온 위고는 다시 정치에 관여하여 좌파 상원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지만 ‘파리코뮌’과 같은 동족상잔에 실망한 나머지 서서히 정치에서 물러선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18일부터 5월 28일까지 72일 동안 파리에 수립된 혁명 정권으로,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소시민 노동자로 형성된 국민군이 대의원을 선출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했으나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정부군과의 대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어쨌든 평등사회의 염원은 프랑스 사회에도 서서히 녹아들어 어느덧 학교에서도 탈종교가 허용되고 자유에 대한 공화주의 대법안이 선포된다. 위고는 집필을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지만 플로베르, 졸라 등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낭만주의 시대와 함께 위고의 시대도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의 선두주자로 떠올랐으며 그의 대표작인 『보봐리 부인』은 지금도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로베르는 누구보다 문체를 중요시한 소설가였다. 그의 글은 완벽하게 짜여졌으며 이런완벽성은 문체를 통하여 가능했다. 그는 단순한 현실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관찰, 실험, 분석을 통하여, 감상을 배제한 채 실제처럼 그렸던 것이다. 그의 이런 문체의식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플로베르 문체의 특징은 '자유간접화법'이다. 그 화법은 서술자가 작중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관성을 은연중에 들어내면서 동시에 서술자가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효과를 준다. 요컨대 서술자가 전지적 입장에서 인물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주관을 드러내주는 화법이므로 서술자의 주관 개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문장론을 강의할 때마다 플로베르의 문체 리듬성과 ‘표현일어설’을 희화시켜 강조하는데, 플로베르는 자기가 쓴 원고를 큰 소리로 낭독함으로써 문장의 리듬을 살렸던 것이다. 문장의 리듬은 비문(非文)을 없애고 아름답고 선명한 음악성을 띠게 하여 읽히는 힘을 줌으로써 의미전달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어느 한 문장에는 그 문장을 낯설게 구조화(예술화)시킬 어휘나 낱말이 끼게 마련이어서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국어사전을 뒤지고, 그래도 찾지 못하면 언어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서라도 꼭 그 어휘와 낱말을 찾아내라고 우스갯소리를 서슴치않는다.

『레 미제라블』은 내용이 풍부하고 인도주의적인 요소와 서사시적인 영감으로 감동을 유발시키는 방대한 소설로 출간 당시 찬반의 거센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위고 필생의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거의가 지나치게 정형화 되어 있어 장 발장, 자베르, 팡틴느, 테나르디에 등은 규격화된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작가들이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일반 대중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다음은 귀에 익숙한 동시대 문인들의 반응이다.

“부정확하고 저속한 문체” (플로베르)

“추하고 하찮은 책” (보들레르)

“거짓투성이” (공쿠르 형제)

이런 반응과는 다르게 당대의 낭만파 시인인 라마르틴은 다음과 같이 함축적인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두 가지 방식으로 매우 위험한 책이다. 행복한 사람들을 너무 두렵게 할뿐더러 불행한 사람들에게 너무 희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이런 반응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주머니에 12프랑만 있으면 이 책을 샀고, 제비를 뽑아 읽고 난 뒤 책 주인을 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공장 노동자들은 돈을 갹출하여 책을 구입할 정도였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유발시킨 요인은 원리를 추구하는 논리나 사회적인 규범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고 인간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연민과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비열한 당시 사회의 비리와 기계적인 법률 해석 등 정의롭지 못한 사회 풍속을 가차없이 폭로한 데에 있다 하겠다..

1815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해질녘 디뉴의 거리에 사십대 중반의 건장하면서도 거지꼴처럼 초라한 사내가 나타난다. 배고픈 어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투옥되어 19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감한 장 발장이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그는 자애로운 주교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깨끗한 침실에서 잠을 자게 된다. 그런데 여섯 벌의 은식기와 두 개의 은촛대를 보고 탐내던 그는 결국 은식기를 훔쳐 야반도주한다. 이튿날 아침에 헌병대장의 부하들에게 멱살을 잡힌 채 주교의 집에 끌려가지만, 주교는 자기가 준 그릇이라고 둘러댄 다음 은촛대마저 가져가라고 내다준다. 장 발장은 눈을 크게 뜨고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듯한 표정’으로 이 거룩한 주교를 바라본다.

그 후 몽페르메유의 화제 현장에서 헌병대장의 두 아이를 구출하여 지역에서 신임을 얻기 시작한 장 발장은 그 지역의 특산품인 흑옥 제조기술로 경제를 살려 시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한편 남편에게 배신당한 팡틴느는 마들렌느(장 발장)의 공장에 취직하려고 어린 딸 코제트를 여관 주인인 테나르디에한테 맡기는데, 악질 테나르디에는 코제트를 볼모로 착하고 가련한 여인 팡틴느를 착취하기 시작한다. 딸을 구출하려다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폐까지 앓게 된 팡틴느는 억울한 일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그 사정을 알게 된 시장 마들렌느(장 발장)는 자베르 형사에게 석방을 명령하고 팡틴느를 돌봐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600프랑을 지불하고 코제트를 빼내오려 할 무렵 시장 마들렌느에게 뜻밖의 불운이 닥쳐온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자베르가 시장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뒤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장 발장은 8년 전부터 수배 중이던 전과자 장 발장이 잡혔다는 말을 듣는다. 고민 끝에 장발장은 자수하고 다시 징역살이에 들어간다. 하지만 장 발장은 코제트의 양육을 위해 창녀로 전락한 팡틴느를 구하려고 감옥을 탈주한 후, 여관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는 코제트를 빼내어 파리로 숨어든다.

세월이 지나 요조숙녀로 성장한 코제트는 마리우스라고 하는 청년의 사랑을 받지만 장발장은 압축되는 자베르의 추적을 피하려고 영국으로 도주할 궁리를 한다. 그때 마침 파리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우스는 혁명군에 가담한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의 양심과 용맹성에 감탄하여 함께 전장에 참여한다.

자베르는 전장에서도 여전히 장 발장의 뒤를 밟는다. 그러다가 왕당파 간첩으로 몰려 죽게될 처지에 놓인 자베르는 장 발장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된다. 여기에서 악마와도 같은 차디찬 피를 가진 자베르 형사의 고뇌가 독자의 가슴을 친다. 자기를 살려준 장 발장을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인간적인 양심을 느끼고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기 직전 자베는 이렇게 독백한다.

악인(장 발장) 덕택으로 목숨을 건진 대신 그 빚을 은혜로 갚는다. (악인이) “가보시오.”라고 한 말에 (나는) “자유방면이다.”라는 말로 갚는다. 개인적인 동기 때문에 의무를 희생한다? 자기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회를 배반한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재판소, 판결, 경찰, 권위 말고도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단 말인가?

자베르는 자신의 심경변화를 타락이라고 여겼고,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싫어졌다. 그래서 타락한 자신을 죽이려고 강물에 투신한 것이다.

한편 장 발장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업고 탈출에 성공, 마리우스를 귀족이며 왕당파인 외할아버지에게 인도한다. 이에 감격한 노인은 외손자인 마리우스와 장발장이 딸처럼 키운 코제트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하지만 악마와도 같은 테나르디에의 음모로 마리우스는 장 발장을 오해하게 된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아내 코제트를 데리고 병원에 누워 있는 장 발장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외친다. 장 발장은 예전에 미리엘 주교가 준 두 개의 은촛대를 사랑하는 그들에게 건네주며 "세상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끈질기게 자베르의 추적을 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온 장 발장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데, 죽음 직전에야 잠시 행복감에 젖어본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중요 등장인물은 실재 모델을 보고 설정된 경우가 많다.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인 미리엘 주교의 모델은 1806년부터 디뉴의 주교직에 있었던 미요리스인데, 그는 자애로운 덕행으로 신부와 신자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흠모를 받았다.

장 발장의 모델로는 피에르 모랑이라는 전과자가 있었다. 그는 1801년에 포르칼키에의 거리에서 빵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투옥된 인물이다. 모랑은 5년 형을 받고 형기를 마친 후에 석방된 후 미요리스 주교를 찾아가 대접을 받았는데 그 또한 장 발장의 행적과 비슷하다. 장 발장이란 인물에 픽션이 가해진 것은 복역 중 4번 탈옥을 시도하다 14년의 형이 불어난 부분이다. 그런데 작품 속 19년의 형기는 위고가 망명생활한 기간과 일치하여 19년이란 기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닌가 싶다.

굶주림이란 극단적인 상황에서 저지른 시시한 범죄 때문에 19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면서 한 영혼이 몰락하는 안타까운 시대적 상황을 고발한 『레 미제라블』. 이 불후의 명작은 사회를 올바른 정의 사회로 구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법과 질서가 때로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뭉갤 수도 있다는 값진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어두운 질곡에서 광명을 찾아가는 장 발장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인도주의적인 세계관과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상주의 사회를 꿈꿔온 위고의 생활과 사상은 웅대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다른 낭만파 시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상적인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는 주조(主潮)가 될 수 없다.

1885년 5월 22일, 위고가 83세로 숨을 거두자 조국 프랑스는 그를 대시인으로 추앙하여 국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날자를 6월 1일로 잡는다. 그의 운구는 200만 명의 애도 속에 가난한 자들이 이끄는 운구차에 실려 팡테옹으로 향했다. (끝)

찰스 디킨스와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의 기념관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더듬기로 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현장(現場)’을 체감해야 디킨스를 온전히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가 16세기 작가이고 디킨스가 19세기 작가지만 이미 신화적 인물에 접근하고 있는 셰익스피어를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면 디킨스 역시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셰익스피어의 흔적에서 인간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디킨스의 작품이 인간의 글이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인간이 쓴 글이어야 했다. 내가 아침 일찍 버스 편으로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포드로 향하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인간의 위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이다. 그의 책상, 그의 육필, 그가 만진 가구들, 그가 밟고 다닌 문턱을 눈여겨봄으로써 나는 그가 신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찰스 디킨스와 똑같이 평민의 자식이며 잉크로 종이에 글을 썼던 영국 작가(극작가)란 사실을 검증하고 싶었다.

나는 왜 이처럼 디킨스를 옹호하는 걸까? 디킨스의 어린시절이 내 불행한 어린시절처럼 참담해서일까? 그게 아니면 디킨스에게서 어떤 체질적인 동질성이 느껴져서일까?

<디킨스 하우스>는 런던 중심지인 블룸스버리의 한적한 다우티 거리 48번지에 있었다. 그의 기념관은 런던을 비롯해 그가 태어난 포츠머스, 어린시절을 보낸 로체스터, 44세 때 구입한 갯즈 힐 플레이스(Gad's Hill Place), 햇살 고운 바닷가 마을 브로드스테어즈 등 영국 남부지방에만 5군데가 넘지만 다우티 거리의 집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이다. 그가 25세 때인 1837년부터 3년 간 거주해온 그 집은 캐서린과 신혼생활을 하며 가정의 기초를 다졌고, 『올리버 트위스트』와 『니콜라스 니글비』 같은 대표작을 썼으며 그의 문운이 열리기 시작한 곳으로 지금도 그가 쓰던 책상 등 중요한 유품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입구에 서서 사진부터 찍고 1층 현관에 들어서니 거실과 식당이 열려 있다. 지하는 리모델링해서 서고로 쓰고, 2층은 서재, 3층은 침실로 구며져 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작위 수여를 거절했는데 다만 작위를 받을 때 입어야 할 검은 예복은 침실에 걸려 있었다.

성서와 섹스피어의 작품 말고는 세계문학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읽혔다는 디킨스 작품들. 세계에서 유머를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로 평가받은 디킨스의 천부적 재기가 그의 창조력에 작용하게 되면 독자들은 여지없이 홀리게 마련이었다.

물론 디킨스의 작품을 풍자 말고는 특성이 없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없진 않다. 심리분석에 탁월했던 헨리 제임스는 디킨스를 “가장 대표적인 얄팍한 소설가”로 지목했고, 디킨스를 위대한 소설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악평했지만 풍자야 말로 문예미학의 극치랄 수 있으며 풍자 자체가 특성인 것이다. 디킨스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제보다 더 강렬한 생명력이 번뜩였고, 그래서 그의 세계적인 명성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다만 지나친 감상적 묘사나 과장된 인물 설정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오히려 그런 묘사나 인물이 독자의 취향에 맞았다. 가여운 '리틀 넬'이 죽었을 때는 근엄하다는 영국 남자들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그의 연재소설이 나오는 날이면 한밤중에라도 마차 배달부가 런던 시내를 누비며 소설 내용을 외쳐댔고, 런던 부두에는 월간이나 격주간으로 나오는 디킨스의 소설을 받아가느라 미국에서 온 배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아마 미국에 디킨스 기념관이 서 있는 것도 그처럼 미국 독자들을 울리고 웃긴 감동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1812년 2월 7일 영국 남해안의 군항도시인 포츠머스 에서 해군 경리국에 근무하던 하급 서기인 존 디킨스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2살일 때는 아버지가 전근하는 바람에 온 식구가 런던으로 이주했다가 5살 때는 다시 뎀즈강 어귀에 있는 채덤으로 이사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좋아한 디킨스는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아버지가 빚을 지는 바람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11살의 어린 나이에 지저분한 구두약 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가, 낮에는 공장에서 고단하게 일하고 저녁이면 두 시간을 걸어 하숙집에 돌아와 혼자 지내야 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채무관계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그것이 디킨스에게 씻지 못할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디킨스는 4년 정도밖에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 15살 전에 모든 교육이 끝났으며 그나마 중간에 학교를 쉬고 공장에 다녀야 했다. 디킨스의 아버지는 호인이었지만 감옥에 들어갈 정도로 금전관리면에서 아주 허술했으며 어머니는 허영심이 많은 편이었다. 디킨스가 30대 중반에 쓴 소설『데이비드 커퍼필드』에서 작중인물 미커버씨와 니클비 부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정한 인물들이다. 디킨스 어머니는 감옥에서 나온 남편이 아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자는 걸 반대할 정도로 자식 교육에 무관심한 여자였다. 디킨스는 "어떤 말로도 그 당시 내 영혼의 비밀스런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고 회상한 적이 있는데, 그가 훗날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작품화한 것은 그때의 체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의 모순과 부정을 직접 체험한 디킨스는 15세 때 변호사 사무실의 사환으로 일했고, 이듬해 민사법정의 속기사가 된다. 그는 한 때 연극에 빠져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디션을 받기도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숙부의 소개로 의회보도지인 <미러 오브 파알러멘트>지의 기자로 일했으며, 그후 <트루 선 신문>의 통신원이 되어 풍속에 대한 견문 스케치를 쓰게 된다. 24세가 되는 1836년 그동안 각 신문에 발표한 소품을 모아 『보즈의 스케치집』 2권을 펴내 호평을 받고, 소설 『픽윅 페이퍼즈』를 연재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전업작가로 나서게 된다. 그 무렵 디킨스는 소품을 기고해온 <이브닝 크로니클>지 편집장의 맏딸 캐서린과 결혼하고, 나중에 자신의 전기를 쓴 존 포스터와 사귀게 된다.

디킨스는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며 자신을 소설가로 키워갔다. 그는 마르크스가 그러했듯 매일 대영박물관을 찾아가 책을 읽었으며 지금도 대영박물관에는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디킨스, 예츠, 맑스가 자주 사용하던 독서실(reading room)이 남아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디킨스는 처음으로 작품을 공식 출판했던 1836년부터 죽을 때까지 월간과 주간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소설을 연재했으며, 부유해진 뒤에는 자선사업에도 열중했다. 그는 두 권의 잡지를 간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올 더 이어 라운드』는 십만 부 가량의 판매고를 올려 당대 최고의 인기물이 되었다. 디킨스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다부지고 엄숙하고 냉정하게 그려진 외모로 보아 빅토리아 시대에 자수성가한 사람의 전형이랄 수 있는데, 밀란 쿤데라는 디킨즈 소설의 따뜻함과 유머는 단지 껍질에 불과하며 "감정이 넘쳐흐르는 문체로 냉혹함을 가렸을 뿐"이라고 평했다.

그가 25세가 되는 이듬해에는 새로 창간된 월간잡지 <벤틀리즈 미셀러니>의 초대 편집장이 되어 거기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재하고, 이듬해에는 요크셔주의 한 학교에서 기숙사 학생을 학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지방을 여행, 이를 소재로 『니콜라스 니글비』를 쓰기 시작한다. 그후 장편소설 『골동품상점』과 장편역사소설 『바아나비 러지』를 연재하며 더욱 인기를 올린 그는 1842년 부인과 함께 6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하여 각지에서 대환영을 받는다. 귀국 후에는 여행기 『아메리카 수기』에 미국을 솔직하게 비평함으로써 일부 미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지만 롱펠로우 등과의 친교는 두터워진다.

1843년에는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쓰기 시작한 5편의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을 출간한다. “가진자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열겠다”는 의도에서 구상하여 6주 만에 완성한 『크리스마스 캐럴』은 자린고비 수전노 스크루지란 인물을 만들어냈는데,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스크루지가 동업자의 유령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는 동화적인 이야기다.

디킨스는 소설 창작 말고도 안데르센 등과의 교우를 넓히고, 아마추어 연극에도 열중했으며, 41세가 되는 1853년에는 처음으로 자작소설 낭독회를 열어 청중들에게서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후 죽을 때까지 낭독회를 계속 열어 영국과 미국에서는 디킨즈의 낭독회가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디킨스가 그처럼 문명(文名)의 상승곡선을 긋게 된 것은 몸소 겪은 체험을 통하여 사회 밑바닥의 생활상과 애환을 생생히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특한 재능인 풍자, 해학, 위트 등을 동원하여 세상의 모순과 부정을 거침없이 비판한 데에 있다. 그의 작품 주제는 1849년부터 매월 분재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쓸 무렵부터 경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여 디킨스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사회를 사람 잡아먹는 오우거(동화 속 거인)로 취급하고 거기에 대항하여 싸우는 개인의 투쟁을 그려나간다. 그전 작품들처럼 주인공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쓴 게 아니라 개인이 어떤 조직이나 체제와 맞서 싸우는 의식화된 모습을 보여주거나, 한 작품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조명하는 파노라마적 구성을 시도한다. 1853년에 발표한 『황폐한 집』이 새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며, 공장직공의 스트라이크를 다룬 『고된 시기』(1854)를 비롯하여 『꼬마 도릿』,『위대한 유산』, 『우리들의 맹우』 같은 작품들에도 그런 사회소설적 경향이 농후한데, 그는 유년시절에 겪었던 감옥 같은 실상을 소설에 생생히 재현시킴으로써 사회 개량의 모티프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특히 『어린 도릿』은 어두운 사회소설로 평가를 받았는데 버너드 쇼는 『자본론』보다도 위험한 책이라 했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보았다.

사회에 대한 디킨스의 그런 반역감정은 부모에 대한 감정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디킨스의 부모는 세상을 살아가기에 무력한 사람들이었고, 디킨스를 교육시키지 않고 공장에 집어넣은 것도 자식의 장래를 생각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저질러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쓰라린 경험은 디킨즈에게 큰 외상(trauma)으로 작용했고 그 상처로 인한 부모에의 반역의식이 사회 탓으로 변질되어 사회를 분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디킨스의 작품에는 허점 많은 아버지, 채무자의 감옥생활, 박탈당한 어린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도 그런 외상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1855년 명성과 부를 얻은 디킨스는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하이햄의 갯즈 힐 저택을 구입한다. 39년 전 아버지는 4살 된 디킨스를 데리고 이곳을 지나다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여기서 살 수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집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극 『헨리4세』에서 할 왕자와 팔스타프가 강도짓을 모의하던 장소이기도 한 그곳은 현재 중등학교 건물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크다.

1857년 45세가 된 디킨스는 아마추어 연극에 협조를 요청하러 온 17세의 젊은 여배우 엘렌 터너에게 마음이 끌려 20년 이상 함께 살아 왔고 10명의 자녀를 낳은 아내 캐서린과 별거하기에 이른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체면을 중요시한 나머지 남한테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사생활을 감추며 살아왔고, 디킨스 역시 근엄한 가장답게 자신을 관리해오다가 엘렌 터너를 만남으로써 이미지에 흠을 내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여동생인 조지아나는 조카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디킨스의 집에서 함께 지낸다. 언니가 갖지 못한 지성과 사교성으로 디킨즈의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온 조지아나는 양쪽 가족들 대부분이 디킨스를 비난해도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형부와 언니의 별거 후에 터져나온 스캔들도 여배우보다는 처제 조지아나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서양사람들은 개인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하다보니 조지아나가 모자란 언니보다는 똑똑하고 현명한 형부를 옹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아내와의 별거와 라이벌 작가인 새커리와의 절교로 정신적 고통이 큰 데다 무리한 소설 창작, 수필과 기행문, 잡지사의 경영과 편집, 자선사업에의 참가, 연극상연, 공개낭독회, 각지로의 여행 등 쉴 새 없이 활동을 계속하는 바람에 건강을 잃었으나 디킨스는 쉬지 않고 장편 『위대한 유산』을 연재하는 등 창작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51세 되던 해에는 장편 『우리들의 맹우』를 연재하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엘렌 터너와 프랑스로 휴양을 떠난다. 그후 건강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자 다시 공개낭독차 미국을 여행하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지만 1868년 4월에는 의사로부터 활동금지를 당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낭독회도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자 집필에만 몰두한다.

58세가 되는 1870년 3월에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작위 수여의 영광을 제의받고도 이를 사양한 디킨스는 추리소설 풍의 장편을 연재하던 중 그해 6월 8일 저녁식탁에서 일어서다가 갑자기 넘어진다. 즉시 소파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이 되어 다음날 9일 『에드윈 드르우드의 비밀』을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그는 세계 각계각층의 애도 속에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고, 그의 소설은 사후 1세기가 넘는 오늘날까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대접받고 있다.

디킨스의 장편소설 『위대한 유산』은 1860년 <일년내내>지 12월호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책으로 출간된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된 『위대한 유산』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추리 기법을 차용한, 그리고 디킨스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신사(gentleman)에 대한 디킨스의 인식수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랄 수 있다. 19세기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금전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진정으로 위대한 유산이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당대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그려놓은 디킨스 소설 중 가장 성숙되고 무게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누나에게 얹혀 자란 고아 소년 핍은 대장장이 매부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던 어느 날 늪지대의 교회 무덤에서 탈옥수 매그위치와 만나게 되고, 굶주린 탈옥수를 위해 누나네 집에서 음식물을 훔치게 된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 핍은 익명의 부호로부터 거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런던으로 나가 신사 교육을 받던 중 마침 같은 마을에 살다가 런던에 머물고 있던 에스텔러와 향락의 세월을 보낸다. 상류사회의 부류처럼 행동하면서 미모와 성적 희롱으로 핍에게 허영심을 심어주려 했던 에스텔러는 출생부터가 기구한 여자였다. 탈옥수 매그위치가 바로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살인자였으며, 사랑하는 남자한테 배신당한 후 마녀처럼 살아가는 해비샴의 양녀이기도 했다.

핍은 에스텔러에게 무시당하고 그녀에게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또 그녀가 선호한 세계와 어울리기 싫어하면서도, 성적 매력이 풍만한 그녀의 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갑자기 속물로 변해버린 핍은, 하지만 자기를 후원해준 은인이 어린 시절 자기가 먹을 것을 챙겨주던 탈옥수 매그위치임을 알고 고뇌에 빠져 지내다가, 매그위치가 죽고 재산이 몰수당하자 욕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 왜 탈옥수 매그위치는 핍에게 유산을 넘겨주려했을까?

늪지대에서 자기를 도와준 고마움 말고도 매그위치는 핍이 신사가 되는 것에 자기 나름의 어떤 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수로서 희망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로서는 자기를 돌봐준 핍에게 자기의 꿈을 걸고 싶었는데 그 보상심리가 바로 핍을 신사로 만드는 일이었다.

"얘야, 난 내가 은밀히 한 명의 신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단다."

매그위치가 핍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매그위치적 '신사'가 결코 이상적인 인물일 수는 없었다. 매그위치적 신사는 그의 개인적인 ‘아름다운’ 욕망일 뿐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본질적 가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핍의 친구인 허버트가 더 신사다웠다. 출생의 바탕이 좋고 아버지로부터 신사도를 익혀온 허버트는 일부러 비천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함으로써 위선과 허욕으로 분식된 자신의 귀족계층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 도전 역시 작위적인 의식화에 불과했다.

그럼 진짜 ‘신사’는 무엇일까?

그 신사는 바로 핍의 매부 조우였다. 핍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새로 태어난 자기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핍의 어진 본성을 애시부터 신임해온 조우. 신사의 요체인 성실하고 진실된 인간형의 전형은 바로 조우였던 것이다. 핍은 매부에게서 위대한 인간상을 느끼게 됨으로써 자신이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깨닫게 되는데, 결국 핍은 조우와 같은 신사가 되기 위해 험하고 비틀어진 길을 에둘러온 셈이다. 그리고 핍은 바로 이 소설을 쓴 디킨스 자신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함으로써 경제대국을 이룬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로는 디킨스와 『허영의 시장』을 쓴 새커리, 『올턴 로크』를 쓴 킹슬리, 『테스』를 쓴 토마스 하디, 『플로스 강의 물레방아』를 쓴 조지 엘리어트 등이 있으며 그들 중 디킨스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로 사회비판적 의식이 모든 작품에 스며있다. 그가 설정한 여러 작중인물들, 일테면 부모 없는 고아지만 진정한 신사로 자란 핍, 결혼 실패로 마녀 같은 삶을 지탱해온 미스 해비샴, 당나귀와 다툰 베치 트로트우드, 섬세하고 따뜻했던 올리버, 넉살좋은 월러, 눈물겹게 착한 리틀 넬 등은 영국인 모두가 기억하는 제도화된 인물들이다.

디킨즈의 소설은 대부분 결말이 뻔하고 줄거리가 인위적이고 유아적이며 인물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으나 디킨즈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이야기꾼이다. 소설은 우선 이야기가 살아있어야 한다. 헨리 제임스,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들이 아무리 심리분석에 파고들었다 해도 이야기야 말로 소설의 본령이다. 또 디킨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미와 유머가 넘치고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사회에 대해서는 절망하면서도 인간의 성정에 대해서는 끝까지 신뢰감을 잃지 않았던 디킨스, 그는 죽은 후에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같은 작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모두가 그의 성실과 열정이 이룩한 결과랄 수 있는데 그만큼 디킨스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의 근면은 꽃처럼 아름답고 열매처럼 옹골찼다.

"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영국의 문호 디킨스가 남긴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