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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소속(所屬)의 의미망

 

비엔나에서 합스브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인 쉔브룬(Schonbrunn)을 둘러보고 곧장 프라하로 출발했다. 리무진 버스로 6시간을 달려야 하는 그 여로의 끝자락에는 내가 ‘찾아 헤맨’ 카프카가 머물고 있다.

정말이다. 나는 오랜 세월 카프카를 찾아 헤맸다. 서점, 극장, 패션가, 카페, 사진관, 빌딩 광고, 연극 포스터에도 존재하고 심지어 내 서재에도 존재하는 그 흔하디흔한 카프카를 나는 진정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의식 속에는 그가 인간이면서 인간의 전형을 비켜난 존재로 입력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연구서가 수천 권을 넘을 만큼 친숙한 이름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세계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름이지만 내게 있어 카프카는 무슨 암호처럼 안개에 가려진 작가였다.

카프카의 이미지가 그처럼 낯설게 인식된 까닭은, 그가 죽은 지 84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카프카의 작품이 기존 틀과 아주 어긋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신비의 세계를 체험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마력은 시공을 초월한다.

요컨대 난해성이 독자를 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잠을 깨워주는 셈이 된다. 불안, 고독, 소외, 부조리, 고뇌, 좌절 등 어두운 관념어들을 독특한 언어 조탁을 통해 소름끼치는 환상세계로 형질변경시킨 카프카의 조화(造化)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홀리고 있다는 말이다.

버스가 비엔나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기사가 <프라하의 봄>을 틀어준다.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보다 훨씬 길고 노골적인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는데,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의 나체와 까만 음모가 보일 정도로 리얼한 장면이 많았다. 두 번째 틀어준 <글루미 선데이>는 버스 여행과 어울리는 고전 영화였다. 순결한 사랑과 역사적인 비애가 우울한 선율로 녹여진 그 영화는, 수많은 사람을 자살로 몰고간 노래 <그루미 선데이>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으로 언제 보아도 새롭게 가슴을 울린다.

어둠이 깔려서야 프라하에 도착하여 볼타바 강가에 있는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버스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흐릿챠니 언덕에 올랐다. 평평한 정상에 성이 나타난다. AD 870년 보헤미아 독립국의 보리보주 왕자가 세운 중세풍의 육중한 프라하 성이다. 그 성은 궁궐, 교회, 미술관, 박물관, 광장 등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카프카가 자주 산책했고 그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성에는 아침부터 각국의 관광객이 번다하다. 정상에 세워져 프라하 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왕궁은 모두 개방돼 있고, 그 안에는 대통령 집무실도 있다. 궁정 앞 광장을 에두른 르네상스 식, 바로크 식 등 고풍스런 건물들이 역사의 하중을 드러낸다. 왕궁 정문 양편에 세워진 제우스와 티탄의 두 석상의 모습이 아주 역동적이다.

언덕을 내려가며 비트성당에 들렀다. 체코 4대 성인 중 하나인 초대 왕 바츨라프1세가 창건한 비트성당에 들어가려고 길게 줄을 선 골목에는 고풍스런 비카르카(Vikarka)식당이 있어 오픈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비트성당 근처에 있는 황금소로(黃金小路)에 갔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인데 길가의 집들은 모두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 거리는 원래 성안에서 일하던 집시와 하인들이 거주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나, 나중에는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벌서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는 선물 가게, 레코드 가게, 서점 등이 들어서 있다. 그 황금소로 중간쯤인 22번지에 카프카가 집필하던 집이 있다. 30대 초반에 카프카는 그의 막내 누이동생 오틀라의 도움으로 약 반년에 걸쳐 이곳에 머물게 된다. 오틀라는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빠 카프카를 이해하고 아껴준 혈족이다.

드디어 카프카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도 역시 카프카답다. 마당 복판에는 파란색의 조형물로 된 두 남자의 벌거벗은 입상이 서 있고, 그들은 마주보고 서서 성기로 오줌(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 쪽 마당에는 카프카의 이니셜인 육중한 K자가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너른 공간에 현대적인 시설로 꾸며진 전시관 입구에는 카프카의 입상이 서 있고 그 옆에 설치된 판매대에서 노파가 책과 잉크, 볼펜, 사진, 엽서, 열쇠고리 등 문화상품을 팔고 있다. 전시실 내부를 차례로 관람했다. 카프카의 저서, 가족사진, 육필원고, 일상용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허공에 걸려 있는 여인들의 유리판 속 얼굴이 인상적이다. 처음 약혼한 펠리체 바우어와 카프카의 숱한 연서를 받은 밀레네 등 카프카와 인연이 얽힌 여인들로 그 중에서도 도라 디아만트의 얼굴이 가장 육감적이다. 20대인 디아만트는 카프카와 처음 동거한 여성이며 카프카가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작별한 키를링 요양소에까지 동행한 연인이다.

카프카에게 있어 문학은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당위였다. 독신과 채식을 고집한 카프카는 허위가 진실이 되어버린 현실세계와 맞서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문학이란 주먹으로 뒤통수를 때려서 각성시켜주는 것이며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썼다.

소년시절부터 스피노자, 헤겔, 니체 같은 철학자에 빠졌던 카프카는 원죄와도 같은 상처를 지닌 채 이방인으로 태어난 셈이다. 프라하의 도심과 유대인의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와의 중간지점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정통적인 동방 유대인이 아닌 유럽화한 서방 유대인이었으며,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이 아니고,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고, 관청에 다녔지만 진정한 관리도 아니었다. 그는 관료의식이 없었다. 프라하 노동자 재해보험국 법규과에 근무하면서도 밤에는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소설이라고 하는 반역행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카프카는 그의 작품 주인공들처럼 중간적 위치에 머문 ‘경계적 존재’였다. 이 경계지대에서 그는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과율과 합목적성이 부정된 세계를 본 것이다.

전쟁과 인간성 파괴의 먹구름이 드리우던 20세기 초의 위기감과 요세프 1세의 해방령(유대인 거주 자유)에도 불구하고 아직 잔존하는 유대인에 대한 관습적인 배타가, 민감한 카프카의 체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가 1921년 10월 29일자에 쓴 일기를 보면 짐작이 간다.

고독한 내면세계와 공동사회 사이의 이 경계지대에서, 나는 거의 밖으로 넘어선 적이 없다. 나는 내면세계보다는 이 경계지대에 보다 더 오래 정착해 있었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실존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일반 대중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으며 획일적인 규격품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방대한 경제구조는 공동사회의 기능적인 역할을 잘 감당하는 인간만을 선호한다. 자기 자신의 개성과 본래성은 용인될 수 없다. 개별성은 악의 개념이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본래성을 인식했다가 추악한 딱정벌레가 되고 말았으며, 『투쟁의 기록』에서는 인간을 “은박지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들”로 묘사했고, 미완성 작품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에서 주인공 라반은 자신을 주체적인 ‘나’가 아닌 회일적이고 기능화된 세인(世人)이라고 불렀다. 세인으로서의 인간은 사랑이니 영혼세계니 하는 중심 가치가 거부된다. 개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거니와, 카프카는 그것들을 딱정벌레처럼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사물로 형상화한다.

카프카의 세계에 있어 직업이야말로 현대인간의 유일한 존재형태였다. 현대 인간에게 직업은 신이다. 어떤 식으로 자기 직업을 신앙하느냐, 하는 그 절대복무가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다. 카프카는 그 절대복무의 층위도 형상화했는데, 그 작품들은 감동의 단계를 넘어 가슴을 찢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런 직업의식은『단식 광대』에서도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굶는 것이 전문인 서커스단의 광대가 동물들에만 쏠려 있는 관중의 관심을 자기에게 되돌리기 위해 몇 달 동안 굶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굶는 일에 충실했다가 짚 쓰레기와 함께 매장되고 만다.

“저는 일년 내내 단식을 해서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주려 했습니다.”

광대가 죽어가면서 감독에게 한 말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우리 속에서 혼자 외롭게 굶기만 한 광대는 그렇게 “단식 예술”에 희생되는 순교자가 되고 마는데, 직업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카프카 작품의 핵심 주제를 여실히 입증한다.

『변신』에서는 그레고르 아버지가 직장에서 입고 일했던 은행 사환의 제복을 집에 돌아와서도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람이 제복을 입는 게 아니라 제복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단편 『유형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형 집행관인 장교에게 있어 처형장치를 조정하는 일은 바로 그의 신앙행위나 진배없다. 그의 직업에 대한 애착 앞에서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온 사형집행제도가 바뀌는 사실을 알고 그 참혹한 처형장치에 직접 누워 자신을 죽인다. 장교는 “자이 게레히트 sei gerecht(본분을 지켜라)"라고 씌어 있는 쪽지를 그의 의도대로 작동되는 제도기 속에 넣어 죄수 대신 자신의 몸을 처형기의 써레로 작살내는데, 그 죽음이야 말로 직업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며, 그 제물은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짜릿한 감동을 느끼게도 한다.

이처럼 잔혹에서 슬픈 연민을 느끼게 하는 카프카 작품의 비의(秘意)에 홀린 독자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이름과 작품이 시공을 초월하여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셰익스피어나 괴테이래 지금까지 세계의 문예비평가들이 가장 많이 텍스트로 다뤄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예비평가 한스 마이어가 <카프카, 정녕 끝이 없는 것일까?> 라는 논문을 썼듯이 상징, 비유, 병치, 풍자, 위트, 패러독스 등 카프카의 언어유희 장치로 교직된 모든 작품의 비의적인 난해성, 다의성, 부조리 등은 역사적 배경이나 연구 주체의 방법론에 따라, 실존주의 시각으로, 형식주의 시각으로, 맑스주의적 시각으로, 실증주의 시각으로, 카발라 세계의 시각으로, 리어리즘 시각으로, 환상문학 시각으로, 초현실주의 시각으로, 정신분석적 시각으로 그 관점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카프카는 꿈과 잠과 명상을 통해서나,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되려는 비몽사몽 중에 작품의 착상이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독자 역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낯선 정신세계와 비인간적인 현실세계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요컨대 초현실적인 세계와 사실세계, 환상적인 세계와 일상적인 세계,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상황이 발생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착각 속에 빠진다는 말이다. 더구나 카프카는 신비한 세계를 다루면서 아주 능청스런 사실적인 묘사로 상황을 객관화 시킨다. 예를 들어 『사냥꾼 그라쿠스』에서는 산자와 죽은자와 비둘기의 위치가 너무 자연스럽다.

“당신(죽은 사냥꾼)이 온다는 말을 간밤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참 자고 있었지요. 그때가 자정쯤이었는데 아내가 살바토레, 하고 내 이름을 부르더니 ‘창가에 있는 비둘기를 좀 보세요!’ 하더군요. 그건 분명 비둘기였는데 수탉만큼이나 컸습니다.그 비둘기가 내 귓전으로 날아와 ‘내일 죽은 그라쿠스가 올 테니 그를 시(市)의 이름으로 맞이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죽어 들것에 누워 있는)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이고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렇습니다. 비둘기가 나보다 앞서 날아갔지요. 그런데 시장님, 내가 리바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뢰비 가문의 율리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육점을 경영한 아버지 혈통은 사업력과 지구력과 정복력이 강한 반면, 어머니 뢰비의 혈통은 고집이 세고 민감하며 정의감이 강했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의 성격에 가위눌려온 카프카는 끝내 아버지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는 훗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저는 카프카의 가통이지만 어머니 쪽인 뢰비가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의 표시인지는 몰라도 뢰비가의 민감성을 타고 난 것만은 사실이다.

카프카의 일생을 조감할 때 아버지와의 불화와 막스 브로트와의 우정 관계가 맨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을 관료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어린 카프카의 내성적인 싹수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거칠게 다루기 시작한다. 어느 추운 겨울밤에 어린 카프카가 물을 달라고 칭얼대자 성난 아버지는 카프카를 내복 바람인 채 발코니로 내쫓고 문을 걸어 잠근 적도 있는데, 자식에 대한 남다른 기대가 강박관념으로 작용한 탓이겠지만 카프카는 평생 그 공포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간섭이 심하면 심할수록 카프카의 성격은 더욱 예민해졌던 것이다.

카프카에 대한 아버지의 집념은 한시도 변하지 않았다. 문학이나 예술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헤르만은 장남인 카프카의 신분 향상을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보낸다. 카프카는 법률공부를 시키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프라하의 독일계 학교인 카를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은 하되 독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듣기도 했으며,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1년간 법관 수업까지 마쳤으면서도 결국은 법조계를 떠나 보험화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 보험 업무가 일이 많아 소설 쓸 시간이 없자 노동자 재해보험국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그 무렵 카프카는 창녀들에게 몸을 맡길 정도로 불안하고 뭐에 의지하고 싶어 했는데, 그런 마음을 친구 브로트에게 소상히 고백한다.

“나는 내게 다정한 손길을 줄 그 누군가를 꼭 찾아야 해. 어제는 창녀와 호텔에 갈 만큼 절박했어”

1908년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카프카가 영원한 친구 막스 브로트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인 1902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 카프카는 대학시절에는 프라하 독일 대학생들의 독서클럽이 주관하는 연설 행사 및 시 낭송회에 즐겨 참가했는데 거기서 브로트를 만난 것이다. 브로트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대하여 강연했던 것이다. 시, 소설, 희곡, 연극, 음악비평 등 예술의 전 장르에 걸쳐 명성을 날리던 브로트는 신문이나 잡지의 비평과 강연 등을 통해서 카프카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으며, 카프카는 자기 작품에 대해 늘 브로트와 상의했다.

평생 카프카와 붙어지낸 브로트는 자신의 일을 미뤄둔 채 카프카와 여행도 같이하고 그의 창작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카프카가 죽을 임시에는 그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사랑하는 막스, 이번에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네. 폐렴인가 보네....이번 기회에 책으로 엮어진『선고』,『변신』,『유형지에서』,『시골 의사』와 단편집 『단식 광부』,『관찰』중 몇 개의 스케치만을 남겨두고, 그 외의 내 글은 모두 불살라주게.”

하지만 브로트는 처음부터 카프카의 부탁을 거절할 마음이었다. 그는 카프카의 천재성과 작품의 우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정하고 아꼈으며, 카프카 작품의 출판을 의무로 여겼던 사람이다. 브로트는 카프카 사후 즉시 작품들을 출판하기 위해 유고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소수의 지식층에만 알려져 있던 카프카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란 프라하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카프카의 친구이자 작가인 빌리 하스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18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이 패하자 프라하는 독립한 체코슬라바키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데 카프카는 그런 시대의 변화를 고스란히 프라하에서 겪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악마적 톤으로 묘사한 대상은 합스브르크가의 통치 세계였다. 훗날 그의 세 누이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파시즘이 아니라 파시즘이 발흥하기 훨씬 이전, 유럽 중심가에 새벽안개처럼 퍼져 있는 그 기분 나쁜 막연한 불안감은 카프카를 통해 악마적인 실체(창작물)로 드러났던 것이다.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큰 프라하는 당시 인구 50만 중 90% 이상이 체코인이었지만 도시의 중심부에서 사회적인 상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주민은 독일인들로(독일계 유태인을 포함하여) 자본과 문화시설을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1년의 보헤미아 박람회를 계기로 체코인의 민족의식이 점차 싹트게 되면서 반발이 거세지는데, 1897년 ‘12월 폭동’에는 반 유태적인 정서가 첨가되어 이때부터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1918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망하자 곧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는데,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와중에서도 카프카는 프라하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중심부를 떠난 일이 거의 없었다.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생가,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아버지의 점포 등이 거의 모두 100미터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반면에 이 무렵 도시의 면모는 크게 변하였다. 도시의 중심 시가지는 도시정화사업에 의하여 집이 모두 헐리고 비엔나 양식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카프카의 의식은 과거의 우중충한 유태인 거주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상실의 원죄를 걸머지고 태어났다. 그의 온 생애에 걸친 고뇌와 노력은 어떻게 해서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세계에 소속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었다. 이제 카프카는 온전히 세계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정화시키는 데에 대표주자로 뛰고 있다.

그처럼 카프카적인 세계는 자기 나름의 실험이나 사상체계에 의해 정립된 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단순하게 열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리스 블랑쇼는 오직 카프카 한 사람만이 소유하는 사상이어서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좋다, 나쁘다, 라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썼다. 즉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며, 수수께끼 같고, 오직 카프카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인데 그게 카프카의 단독성(單獨性)이다.

현실세계가 불안할수록 이상세계의 윤곽은 더 확연히 드러나는 법. 카프카는 독일계 학교를 다니고 독일어를 썼지만 프라하의 상류층 독일인들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오니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때문에 카프카는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혐오하고 억압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는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성명서를 만들고 사회주의 서클에서도 활동한다.

1907년 『시골에서의 혼례 준비』를 쓰기 시작한 카프카는 이듬해 휘페리온 지에 처음으로 8편의 산문을 발표한다. 1910년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유대인 극단원 이차크 뢰비를 만나 우의를 다지는가 하면, 브로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며 창작의 지반을 다진다. 차츰 필력이 붙은 그는 1912년 한 해 동안에만 장편소설 『실종자』를 구상하고, 첫번째 작품집 『관찰』을 출판하고, 단편 『선고』를 발표하고, 중편 『변신』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브로트와 함께 바이마르와 융보른을 여행하고, 브로트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프라하에서 최초로 『선고』의 공개 낭독회를 갖는다.

카프카 작품의 특색은 작품마다의 형식이나 인물이 작품의 문맥에 따라서 기능이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 “형식이나 인물을 일률적으로 동일 선상에 놓고 규격화하는 것은 위험하다.”(엠리히의 <카프카론>) 그의 모든 작품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그의 독특한 비유 세계나 언어의 독특한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그의 대표작인 중편소설 『변신』에서는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레고르는 가정의 선량한 아들이며 회사에서는 모범적인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가정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존재였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빨리 부모의 부채를 갚고 퇴직해서 자기가 원하는 생활을 갖고 싶어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소망 때문에 ‘소속’에서 추방되어 벌레가 된 것이다.

장편소설 『소송』에서도 주인공 요제프 K가 서른 살 되는 날 아침, 자고 난 하숙집 침실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낯선 두 사나이에 의해 체포된다. K는 아무 죄도 없거니와 그가 찾아간 법원도 초라한 임대주택의 다락방인 데다, 합법적인 재판이나 판결도 없이 처형당한다. 여기에서 죄, 법, 법정은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와의 파혼으로 입게 된 죄의식이 모티브로 작용했는데, 카프카는 일기에서 파혼 장소인 베를린의 아스카니셔 호텔을 ‘법정’ 혹은 ‘법원’으로 표시했고,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기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체험(파혼)을 초월적인 차원, 즉 그 ‘알 수 없는’ 법이나 법정의 차원으로 심화시키는데, 미완성 작품인 『소송』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함께 20세기 독일어권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카프카 작품의 신비성과 난해성은 낯설게하기 식의 표현법과 같은데, 그 낯설음은 카프카의 반역정신에서 싹이 텄다고 볼 수 있다. 카프가의 작품들에 그려져 있는 것은 일상의 이치나 습관이 거의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이다.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빈 교외의 키를링 요양소에서 요양 중 1924년 6월 3일 눈을 감은 카프카는 6월 11일 프라하에 묻힌다. 그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밀란 쿤테라의 고향인 브르노(Brno)로 떠나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냥 지나치게 되어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 나는 무덤을 찾아가 이렇게 묻고 싶었다.

“카프카씨, 당신은 무덤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어떤 처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보험회사 업무보다 소설쓰기에 더 미쳐 지낸 그 무거운 죄 때문에 지금도 엄청 시달리겠죠? ‘소속’을 일탈한 죄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잘 아시면서, 회사 일만 잘할 게지 왜 소설을 탐했나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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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 / 푸슈킨 2014.06.10
48 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 2014.06.10
47 괴테와 자연, 그리고 인간적 신의 욕망 / 괴테 2014.06.10
46 존 스타인벡과 <분노의 포도> / 스타인벡 2014.06.10
45 톨스토이즘과 <부활> / 톨스토이 2014.06.10
44 살아 있는 성경책 <레 미제라블> / 위고 2014.06.10
43 찰스 디킨스와 <위대한 유산> / 디킨스 2014.06.10
42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2014.06.10
41 『세계문학관 기행』 (서정시학 발행)카프카와 소속(所屬)의 의미망 .... 카프카 file 2014.06.08
40 [그린경제, 2013/01/12] [세계문학기행(18)]톨스토이즘과 <부활>(하) 2014.06.05
39 [그린경제, 2013/01/05]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17)]톨스토이즘과 <부활>(상) 2014.06.05
38 [그린경제, 2012/12/16] 세계문학기행(15)-존 스타인벡과 <분노의 포도>(상) 2014.06.05
37 [그린경제, 2012/12/09]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14)-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하) 2014.06.05
36 [그린경제, 2012/11/29]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13)-푸슈킨과 예브게니 오네긴(상) 2014.06.05
35 [그린경제, 2012/11/11] 세계문학기행(11)-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하) 201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