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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소리 연재] <미친사랑>88회

2014.12.04 10:35

잔아 조회 수:605

 오늘은 서울대 동향이 잠잠했다. 용해는 오후에 여당 중진인 최 의원댁을 방문하여 선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원이가 임파선결핵으로 며칠째 치료를 받고 있는 소아과의원을 찾아갔다. 앞으로 여섯 달 정도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매일 장은하가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데 오늘은 엑스레이를 찍는 날이어서 용해도 병원에 가본 것이다.
 
  수속이 끝나자 엑스레이 촬영에 들어갔다. 뒷짐을 지고 사진대에 선 그놈의 모습이 가엾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장은하는 걱정스런 눈으로 성원의 사진 찍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장은하는 말이 없고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허전하게 웃을 뿐이었다.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용해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짚이는 데가 있기는 했다. 엊그제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에서 낙서 같은 장은하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공연히 불안감을 느낀다”라고 씌어 있었다. 진작 그 글의 뜻을 캐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용해는 병원에서 집에 돌아와서야 이유를 캐물었다. 그러나 장은하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용해는 장은하의 침묵이 두려웠다. 그 침묵 속에는 예사롭잖은 예감이 묻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야?”
 
  용해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침묵의 두려움에 대한 길항이었다. 개가 짖으면 대들 때 눈을 부라리며 쫓아버리듯 용해는 장은하의 그 불길한 침묵에 큰소리로 대항했던 것이다. 그 침묵에 대한 두려움은 그녀에 대한 애정만큼 컸기 때문에 목소리도 그만큼 거칠었다.
 
  “어서 말해! 그년이 찾아왔지? 그렇지? 말해봐! 그렇지?”
 
  장은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지?”
 
  “별다른 얘긴 없었어요. 좋은 사람끼리 만났으니 잘살아보라고만 했어요.”
 
  “성원이한텐 어떡하고?”
 
  “그냥 서울아줌마라며 한번 안아봤을 뿐이에요.”
 
  “지금 어디서 산대?”
 
  “밝히지 않았어요.”
 
  “오빠네 집에 있다는 말 안 해?”
 
  “거처를 물어봤더니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고만 했어요. 하여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쓰지 말아요.”
 
  “신경 안 쓰고 될 일야?”
 
  “내가 잘못한 것 있음 사죄해야죠.”
 
  “뭣이? 사죄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전혀 하자가 없어.”
 
  “하자라뇨? 왜 가정문제에 그런 사무적인 말을 함부로 쓰죠? 나는 내 앞길을 잘 알고 있어요. 거기에 대한 대책도 세워놨고요.”
 
  “대책이라니?”
 
  용해는 덜컥 겁이 났다.
 
  “나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일이죠. 내가 얼마나 인내할 수 있고 성실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용해는 긴 숨을 내쉬었다. 장은하의 당돌한 말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은하는 결코 여리지 않았다. 그녀의 평화로운 얼굴과 순박한 웃음에 비해 강한 여자였다. 그러기에 용해는 장은하의 아기가 되고 싶어했다. 그에게 있어 아내란 바로 엄마였다. 지칠 대로 지친 그로서는 편안한 엄마의 품속이 그리웠다.
 
  장은하는 내 아내다. 잠자던 아기가 엄마의 젖꼭지를 만지듯 용해는 수시로 장은하가 아내임을 확인했다. 비록 혼인신고를 못하고 예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그 따위 요식절차보다 애정이라고 하는 더 강한 구속력에 얽혀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줘, 내가 자세히 알아야 될 일이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방금 한 얘기가 다예요.”
 
  장은하는 거짓말을 했다. 미나가 찾아와서 한 행동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곧이곧대로 알려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남편에게 고민만 안겨줄 뿐이었다. 미나가 행패를 부리는 것도 용해를 괴롭히려는 의도임을 장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은하가 한 가닥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용해에 대한 해코지를 재미로 삼는 미나의 그 집착이었다.
 
  미나가 장은하를 찾아온 것은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장은하를 두 가지 방법으로 고문했다. 완력과 눈물이었다. 처음에는 보통 여자들이 그러하듯 머리칼부터 거머쥐고 흔들었다.
 
  “요년아, 유치장에서는 팔을 뻗을 수 없어 쥐어뜯지 못했지만 이젠 마음 놓고 너를 조질 수 있어.”
 
  미나는 맹렬한 기세로 장은하의 머리칼을 뜯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렇게 악을 쓰던 미나는 한참만에야 자기가 바윗덩어리와 싸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은하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그 고문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참말이었다. 장은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지독한 년!”
 
  미나는 장은하의 얼굴에 퉤 침을 뱉었다. 그래도 장은하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스며있었다.
 
  욕을 퍼대던 미나의 입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금방 방안에 정적이 쌓였다. 길고 긴 침묵이었다. 장은하는 폭력보다 그 적막이 더 참기 힘들었다. 무슨 꿍꿍이속일까? 두 번째 공격을 위한 휴식일까? 아니면 이 방에 아주 드러누울 작정일까?
 
  장은하는 덜컥 겁이 났다. 미나가 날마다 찾아와 방에 드러누워 지낸다면 대책을 세우기가 힘들었다. 그깟 고문쯤이야 참으면 되었지만 그 짓만은 인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성원이가 문제였다. 성원이 말로는 서울아줌마라고 부르지만 눈치는 뻔했다. 오히려 서울아줌마라고 부르는 그놈의 내숭이 더욱 불안했다.
 
  솔직히 엄마라고 부르면 일찍 매를 맞는 셈이 되잖은가. 그게 숫제 마음 편할 것이었다.
 
  “미안해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했다. 미나의 잔잔한 목소리였다.
 
  “은하 씨에게 덤빈 것은… 유치장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렇게 하고 싶었다오. 당신이 뻔뻔스레 찾아왔을 때 무서운 짐승을 만난 공포감에 벌벌 떨었다오. 나는 그 짐승한테 먹히면 안 된다고 이를 갈았소. 언제고 한번은 당신을 물어뜯고 싶었죠. 내 폭력을 용서해줘요.”
 
  어느새 미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장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떠다주었다. 장은하는 미나의 입가에 말라붙은 소태를 씻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을 마신 그녀는 혀로 입 가장자리를 핥고 나서 말을 덧붙였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이 효과적인 줄 알았는데 내 판단착오였소. 당신은 다루기 힘든 여자니까 이제부턴 직접 남자를 괴롭혀야겠어요. 그 남자를 괴롭히는 거야 쉽거든. 나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으니까. 팔 년 동안 사용해 온 방법이거든. 누가 이런 말을 했대요. 젤 무서운 게 자폭이라고요. 죽음을 두려워해야만 무슨 대책을 세울 텐데 죽음을 즐긴다는 데야 속수무책이죠 뭐.”
 
  미나는 빙그레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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