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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아 김용만 장편소설 (2) 부여 찾아 30000

 

당신의 그 맹목적인 내조를 높이 살 거요

당신은 아주 멋진 여자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나에 대한 내조는 여전할 테니 말요. 내 말은 억지 사랑이나 억지 내조도 좋다는 거요.”

 

3

 

교도소에서 남편을 차에 태우고 집에 들른 순영은 동민과 다희를 내려놓고 곧장 청평호반 쪽으로 달렸다. 별장에서 조용히 쉬면서 구겨진 생활을 다듬어볼 참이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정원에 들어서니 순영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관리인 부부가 미리 차려놓은 저녁상에는 촛불이 켜있고 와인병이 놓여 있었다.

목욕부터 하세요.”

백상태는 아내의 그 평범한 말이 따스했다. 거창한 말만 구사해온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금방 주먹을 부르쥐었다. 다시 마이크를 잡게 되면 국가, 민족, 번영, 희망, 우렁찬, 새 역사보다 더 거창한 용서, 화합, 박애, 희생을 외치고 싶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백상태가 순영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여보, 고생시켜서 미안하오. 나는 밤마다 당신의 몸을 껴안고 잠들곤 했소. 당신 몸으로 모든 잡념을 지우려 했지.”

살결이 더 뽀애졌어요.”

순영은 얼른 자기 허벅지를 꼬집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아야 했다. 백상태의 몸이 편리한 도구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는 아무 남자와 동침하는 것보다는 나을 성싶다는 생각, 그 슬프면서도 허물어진 생각이 연방 헛웃음을 자아냈다.

그동안 남편의 명예를 위해 내 나름의 열정을 쏟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정성이 수치스러워요. 그렇다고 부부간인데 무관심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그렇다고 애정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도 없고. 하루하루 맹목적으로 지내자니....”

아내의 싸늘한 말을 듣고도, 백상태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받았다.

나는 그 맹목적인 내조를 높이 살 거요. 당신은 아주 멋진 여자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나에 대한 내조는 여전할 테니 말요.”

압력인가요?”

그게 무슨 소리요. 내 말은 억지 사랑이나 억지 내조도 좋다는 거요. 그 형식이 내겐 진실인 거요. 내용만 진실이 아니라구.”

백상태는 아내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순영은 남편의 말이 솔직해 좋았다. 남편의 어이없는 언표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남편의 비열한 짓을 겪은 후로 진실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숫제 거짓이 좋았다. 위선이 아니면 싱겁고 촌스럽고 유치하게만 들렸다. 진실이니 정직이니 하는 단어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았다. 백상태가 수뢰한 돈을 숨겨둔 애인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도 숫제 마음이 편했다. “그 여자가 하도 내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 말도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오히려 백상태가 여자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그나저나 애들도 애비를 원망하겠군. 친구들에게 창피할 테니....”

그런 거에 상처 입을 애들이 아녜요. 늘 명랑해요.”

당신도 친구들 보기가 민망하겠구려.”

국회의원도 남잔데 바람피울 수 있는 거죠 머.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친구들과 새롭게 어울리도록 해요.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보고.”

그나저나 모처럼 고향에 다녀올까 하는데....”

고향은 왜?”

순영이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를 짓자 백상태도 금방 표정을 다듬었다. 아내의 일이라면 무관심해온 남편이지만 귀향에 대해서만은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순영은 백상태와 결혼한 후로 고향을 두세 번밖에 다녀온 적이 없지만 백상태는 아내의 귀향을 꺼려했다. 찬혁 때문이었다. 부여에 가면 혹시나 찬혁의 소식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꺼림했던 것이다.

찬혁의 자살미수 사건 후 그동안 순영은 무척 고심해왔다. 당장 찬혁의 거처를 알아보고 싶었어도 남편이 수감 중이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25년 동안 잊어온 사람이지만 자살미수 사건을 보고도 모르쇠로 버티기엔 양심의 하중이 너무 무거웠다.

나는 죄인이다. 아니, 죄인이어야 한다. 내가 잘못한 건 없어도 그 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순영은 여태까지 그 말을 되뇌이며 살아왔다. 물론 25년 전에도 찬혁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찬혁이 행방을 감추고 일 년도 못 되어 백상태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고 가정생활에 바쁘다보니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4

 

서울을 떠난 고속버스는 두 시간여 만에 부여 시내로 진입했다. 순영은 차창 밖으로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승용차 대신 고속버스를 이용한 그 여유가 마음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버스에서 내린 순영은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충화 쪽으로 달렸다. 규암을 지나 홍산에 이르렀을 때는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옛날 구시가를 걸어보았다. 유난히 화사했던 포목전 거리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진둥재 쪽으로 방향을 틀어주세요.”

다시 택시에 오르자 순영은 옛길을 달려보고 싶었다. 새뜸에서는 면소재지인 충화 쪽보다 진둥재를 넘는 게 직선길이었다. 진둥재에는 도깨비가 많다고 소문난 데다 행정구역상 서천군 땅이지만 충화 쪽은 첩첩 산중이어서 낯설었다. 더구나 충화에서 새뜸에 가려면 험준한 천당산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천당고개는 진둥재보다 도깨비가 더 많았다. 밤에 천당고개를 넘으려면 도깨비가 씨름하자고 대드는 바람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순영은 어렸을 때 들은 이웃들의 도깨비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그 중에서도 옆집 두왈씨의 체험담은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었다. 두왈씨 부부는 순영네의 집안일을 도맡은 처지여서 그들 부부의 사투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했다.

왼쪽다리를 걸지 그랬슈? 그래야 도깨비가 맥을 못출 틴디.”

아내가 아는 척을 하자 두왈씨는 왜 자꾸 쓰잘 데 없는 소리를 뒤적이냐며 투덜댔다. 두왈씨의 그런 투정은 도깨비한테 홀렸다고 떠들어댄 자신의 우매한 짓을 감추려는 수작이었다. 요컨대 아내에게 무식한 꼴을 보인 그 허튼짓이 민망했던 것이다.

증말루 도깨비가 존재허겄어? 말짱 거짓말인겨. 도깨비를 꽁꽁 묶어놓고 다음날 가봉게 빗자루였다구 떠든 건 모다 꾸며낸 말인겨. 오밤중에 혼자 가다가 으시시한 디서 넘어진 걸 도깨비에 홀렸다구 착각한 거라구.”

얼레, 도깨비는 조화를 부리잖어유.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그런 조화꾼인디 빗자루로 둔갑하는 건 눠서 떡먹기쥬.”

이 마누라, 또 빡빡 우기는 것좀 봐. 이 무식쟁이야, 지금 같은 개명천지에 도깨비가 워딨어?”

남편은 초등학교를 나온 지식층이라고 뻐기는 터라 과학적 논리를 세우려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아내는 남편한테 무시당해온 터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개명천지라구혀서 도깨비가 읎다는 법 어딨슈? 그러구, 전깃불 구경하러 홍산까지 갔다면서 그런 세상이 개명천지라구?”

앗따 우리 마누라, 되게 유식허네. 내 말은, 전깃불이 생긴 것 자체가 개명이다 그 말여. 알것남? 우리 선생님.”

암튼 선생님이라구 불러준 게 고맙네유. 우리 주정뱅이가 인재사 속차렸나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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