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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아(김용만) 장편소설 (4) 부여 찾아 30000

 

네가 계집애가 아니고 머스매라면 이 칼로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엄격한 홀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찬혁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갑자기 포악해지면서 술과 싸움질로 세월을 보냈다. 들리는 말로는 사관학교를 지원했지만 연좌제에 걸려 불합격된 후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어째서 이 길로 걸어오는 거여? 저 아래 포장길로 휭 달려오질 않구?”

편해서요.”

그건 또 뭔 소리여? 홍산서 예까지 이십 리 길이 넘는디 편하다니?”

홍산서 곰당굴까지는 버스로 왔어요.”

곰당굴서 예까지도 거의 십리길인디?”

낯익은 옛길이 좋아서죠.”

참 이상하군. 나이든 사람들도 신식을 찾는디 순영이 같은 젊은이가 옛길을 찾으니 말여.”

이장은 순영의 말이 입맛을 돋우는 모양이었다. 충화에서 가화리 송정호숫가를 거치는 포장도로가 뚫린 후로 구도로에 대한 예찬을 들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짐 실은 우마차의 워낭 소리와 학동들의 재재거리는 소리가 질펀하던 구도로였는데 이제 잡풀이 무성해진 길바닥을 보며 이장은 한숨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도로의 퇴락과 함께 주막 장사도 거덜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순영이 그 버림받은 길을 좋아하다니. 이장은 순영이 기특했다. 외톨아지고 과욕스런 그녀의 죽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전덕술의 핏줄치고는 마음씨가 달라 보였다. 순영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부터가 전가네 핏줄과는 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이 검측하고 두툼한 데 비해 순영은 어머니 얼굴을 닮아서인지 희고 곱살했다. 허약체질부터가 어머니의 갸름한 체구를 닮고 있었다.

얼푸시 소문은 들었지만 몸이 어떻게 아픈 거여?”

별 것 아녜요. 조심만 하면 성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데요.”

아암 그래야지. 그럼 어서 가봐, 아버지는 읍내에 나갔을 거구먼.”

요즘도 부여에 나다니시나요?”

그 사람이야 만날 기관장 유지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일이지. 소문에는 큰일을 꾸밀 것 같던디.”

이장이 말한 큰일이란 정치판을 의미했다. 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가 정치에 뜻을 둔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언짢았다.

요즘 동네 분위기는 어때요?”

옛날 같지는 않여. 자네 아버지가 화해를 모색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많이 달라졌어. 그런디 찬혁이가 이사 온 뒤로 또 분위기가 얼어붙었어.”

저는 이참에 몸을 쉬려고 내려오지만 정말 동네에 정이 안 들어요. 앞으로 이장님이 새뜸 화해를 위해 노력해주세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구....”

이젠 이장님도 동네일에 떳떳이 관여하세요. 이장님을 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순영의 말에 이장은 가슴이 뿌듯했다. 타관에서 흘러들어와 주막거리 장사로 나이를 먹어온 처지인데, 지역 최고 유지의 외동딸에다 배움과 인물이 소문난 순영에게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게 고마웠다. 그는 감동한 나머지 덥석 순영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

그때였다. 먼지를 날리며 황새모롱이를 돌아온 오토바이 한 대가 주막거리에서 멈춰섰다. 삼십대 초반의 덩치 큰 사내는 오토바이를 탄 채 이장에게 인사를 차리며 어머니 약시중 때문에 일찍 퇴근하는 길이라고 말을 보탰다. “효자구먼.” 이장이 자상한 얼굴로 인사치례를 하자 사내는 요란한 폭음을 내며 위뜸 쪽으로 내달렸다.

사내의 시선이 순영의 얼굴에 이삼 초 동안 머물렀을까, 그 날카로운 응시에 찔려 순영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사내의 몸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피냄새와도 같은 섬뜩한 기운이었다.

누군지 알어?”

잘 알아요. 부여읍내에 살던…․

맞어. 찬혁이여. 요즘은 홍산 목재상에서 일한다지만 깡패짓은 여전한가봐.”

언제 이사 왔죠?”

석 달 전여. 모친네가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대. 부여로 이사한 지 오 년 만에 돌아온 셈이지. 그동안 에미 속을 어지간히 썩혔는디, 착한 사람이 어째서 그리됐나 모르겄어. 고등학교도 우등생으로 졸업했는디 말여.”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순영은 막연한 한마디를 흘리고 나서 이장과 헤어졌다. 순영은 방금 찬혁을 역성 든 자신의 태도가 이상했다. 어려서부터 징그럽고 흉포하게만 여겨온 인간한테서 연민의 정이 느껴지다니....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엄격한 홀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찬혁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갑자기 포악해지면서 술과 싸움질로 세월을 보냈다. 들리는 말로는 사관학교를 지원했지만 연좌제에 걸려 불합격된 후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폭력 전과 삼 범에다 아직까지 처자를 거느리지 못한 그는 어머니가 몸져눕자 약시중으로 집에 붙어있게 되었다.

찬혁이를 조심해라.”

순영은 어머니의 옛 당부가 떠올랐다.

그자는 늘 몸에 칼을 숨기고 다닌단다. 읍내에서 혹 마주칠지 모르니 몸을 조심해라. 우리 집에 아들이 없어 후손을 거덜내지 못하는 걸 원통해 하는 작자다.”

어머니는 항상 그런 말을 곱씹었다. 순영은 초등학교 오학년 때부터 어머니의 당부를 들어온 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 순영의 눈에 비친 찬혁의 모습은 정숙한 학생이었다. 고등학생인 찬혁을 가끔 등하교 길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교복을 단정히 입은 데다 인상부터가 착해 보였다.

그런 찬혁이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돼 악마로 변신하다니, 순영은 아래뜸 사람들이 일부러 꾸며낸 말로만 들렸다. 하기야 술에 취한 벌건 얼굴로 대낮에 읍내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찬혁을 종종 보아오긴 했다. 어느 땐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뒹구는 꼴도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순영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중학교 일학년 때던가, 한번은 찬혁과 단 둘이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부여에서 귀가하는 중이었다. 충화면소재지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벌써 계곡에 갈매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천당고개로 접어들 무렵에는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순영은 달리다시피 발길을 재촉했다. 길가의 수목들이 산발한 악귀처럼 보여 소름이 끼치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반딧불 같은 불빛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싶더니 시커먼 몸체가 앞을 가로막았다. 찬혁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물씬거렸다. 그는 칼집에서 빼든 잭나이프를 순영의 얼굴 앞에서 빙빙 돌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계집애가 아니고 머스매라면 이 칼로...”

순영은 숨이 콱 막혔다.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싶었지만 입이 굳어 열리지 않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찬혁은 칼을 다리에 찬 칼집에 넣고 담배 한 모금을 빨아 후욱 내뿜고 나서야 팔충리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고갯길을 달려내려간 순영은 부락에 도착한 후에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의 걱정은 순영이 서울로 진학하고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긴커녕 되레 점점 더 무서운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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