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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아(김용만) 장편소설 (5) 부여 찾아 30000

 

꿈틀거리는 뱀을 잘근잘근 씹었다는 거야


예쁘게 낳고 잘 가르치기만 하면 딸자식도 좋은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순영은 재능까지 갖췄겠다 비쌀 만도 했다. 백상태 제까짓 게 아무리 예비재벌이라 해도 우리 순영이 만한 상품을 고를 수 있을라구, 전덕술은 저절로 입이 헤벌어졌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꼭 아침 차를 타고 오도록 해라. 읍내에 늦게 도착하면 밤길을 걷다가 혹 그자를 만날지 모른다. 네가 컸으니까 음심을 품을지 몰라. 요즘은 성깔이 더 포악해져 법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더라. 낮에도 버젓이 칼을 꿰차고 다니며, 이 칼에 전가 놈 푸네기의 피를 묻히는 날이 장가드는 날이라고 떠들어댄대. 그자가 얼마나 포악한 줄 아니? 꿈틀거리는 뱀을 입으로 잘근잘근 씹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 뱀이 네 할아버지라고 소리치더래. 읍내에서는 미친데기라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그 사람이 우리한테 품은 원한이 뭔데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할아버지 적 일인 모양인데…….”

사실 어머니인들 자세한 내막을 알 턱이 없었다. 동굴 속 같은 그 음험한 비밀을 할아버지 혼자 알고 있겠지만 생전에도 감히 캐물을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침묵만 지켜왔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래뜸 사람들은 입을 쉬쉬할 것이고 위뜸 사람은 캐물을 상대가 없었다.

이장과 헤어지고 주막거리에서 밭둑길로 접어든 순영은 길가에 무성히 깔린 클로버, 씀바귀, 개비름을 눈여기며 걷다가 발길을 세웠다. 초등학교 시절 치맛자락에 이슬을 적시며 걸어다니던 그 밭둑길에는 늘 풀내가 설핏했다. 순영은 클로버 꽃 두 개를 꽃대째 따서 꽃을 엇엮어 손목에 묶었다. 행운의 시계, 순영은 그 클로버 시계를 누군가의 손목에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채워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마음이 허전했다. 노처녀가 되도록 마음을 줄 수 있는 남자가 없다니, 순영은 잠시 백상태를 생각하다가 머리를 모로 흔들었다. 도저히 그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성화를 부려도 백상태와의 결혼은 불행해질 것만 같았다.

순영이 공회당 앞을 지나 솟을대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느새 대문 밖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반색하며 다가와 가방을 받아들었다. 딸의 얼굴에 묻어 있는 근심을 거니챈 어머니는 결혼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건강부터 챙기라며 기분을 풀어주었다.

훨훨 벗고 멱부터 감아라.”

아버지는?”

방금 읍내에 나가셨으니 늦게 들어오실 거다.”

엄마 양념장 솜씨는 여전하겠지?”

멱 감을 동안 상추 씻어서 밥상을 차릴 테니 밥 먹고 유원지로 나가봐. 이 동네도 엄청 변했어. 밤이면 꽃밭이야. 아무 걱정 말고 스트레스를 풀으렴.”

어머니는 안마당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말을 이었다. 순영은 어머니의 수다가 딸의 마음을 보듬기 위한 애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순영은 그런 어머니가 가여웠다. 겨우 외동딸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즐거움과 희망은커녕 병치레만 보여주다니.

엄마 음식 솜씨를 생각하니 금방 입맛이 돋아났어. 갖은양념을 쳐서 버무린 맛장으로 상추쌈을 해먹는 기분, 우우우 너무 멋져!”

순영은 뒤란으로 걸어가며 연방 너스레를 떨었다.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뒤란 후박나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순영은 후박나무를 보자 진작 맡아보지 못한 꽃향기가 아쉬웠다. 세상에 어느 향기가 이처럼 그윽할까, 널따란 잎사귀에 보듬어진 청아한 꽃은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고 흙 속에 묻히겠지. 저 매미소리는 후박꽃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일지 몰라, 순영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한발 한발 나무 그늘 속으로 다가갔다.

왜 자꾸만 슬퍼지는 걸까?

그녀는 뜨거워지는 눈자위를 식히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순영은 활달한 성미였다.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저돌성에서 변화의 기교와 신선함을 느낀 그녀였다. 그래서 대학 학과도 색상을 요리하는 의상 디자인 계통을 선택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전공 분야에 천착해볼 요량으로 경험삼아 패션코너에 취직했던 것이다. 그런 순영이 직장을 포기하고 귀향하게 된 것은 허혈성 심장병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어여 옷 벗고 씻어.”

어느새 어머니가 부엌 수도꼭지에 연결한 고무호스를 뒤란으로 가져왔다. 시원한 물이 자배기에 콸콸 쏟아졌다. 뒤란은 담장와 사철나무로 오붓하게 가려져 있었다. 순영은 옷을 벗고 자배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버지는 내년 봄 지자제 선거에 출마하신다더라.”

어머니는 딸의 등에 비누칠을 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버지 같은 분이 무슨 정치를 하신다는 거죠?”

뭔 살판이 나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제는 정치가 심심풀이 오락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나설 정도니까.”

엄마는 아버지를 무시하지?”

무시가 아냐. 비평이지.”

남편에 대한 애정이 두터우면 비평할 수 없잖아요.”

순영은 살며시 어머니의 속을 떠보았다.

애정과 비평은 다르다. 오히려 사랑하니까 자신 있게 비평하는 거지.”

아냐. 엄마는 지금 거짓말을 하시는 거야. 분명 아버지를 무시해. 그러니 의무적으로 사시는 것뿐야.”

그건 잘못 생각한 거다. 내가 네 아버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 땜에 다만 정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뿐야. 또 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있는 정치판인 만큼 실망하는 거구.”

어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순영도 따라 웃었다.

요즘 네 아버지 기분은 읍내에서의 기상도에 따라 밝아지고 어둬져. 가정생활 역시 그 기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고.”

그렇다. 전덕술의 읍내 하루 기상도가 집안 분위기에 끼치는 영향은 무척 컸다. 예를 들어 내년 봄에 실시되는 지방의원 선거에서의 여당 공천 분위기가 그에게 유리한 기상도로 형성되면 그의 기분은 늘 쾌청했다. 그런데 요즘 읍내 기상도가 연일 쾌청한 모양이었다. 밤늦게 귀가한 전덕술은 얼굴에 환한 미소까지 띠며 먼저 딸에게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순영은 아버지의 접근 의도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보나마나 백상태와의 결혼문제일 텐데 그를 사위로 삼아야만 정치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요즘 선거열병이 들어 있는 전덕술로서는 백상태와의 혼사보다 더 입맛 나는 말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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