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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청춘] 1. 김용만 소설가 (75)

일흔이 넘은 지금도 창작에 열중… 20~30대 의식 지니려고 애써   


▲ 잔아문학박물관 속 김용만 소설가의 서재. 그는 책을 펴며 말했다. 책을 읽으라고. 아니, 책에 손대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읽은 것이니 가까이 하라고. 문학에 대한 신앙같은 애정에서 우러나온 당부다. 그것은 김 소설가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다. 
 ▲ 잔아문학박물관 속 김용만 소설가의 서재. 그는 책을 펴며 말했다. 책을 읽으라고. 아니, 책에 손대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읽은 것이니 가까이 하라고. 문학에 대한 신앙같은 애정에서 우러나온 당부다. 그것은 김 소설가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82세에 완성했거든.

의술도 좋아지고 나는 최소한 85세까지, 10년은 더 써야겠다(생각해). 어제도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글 썼어.”

49세에 등단해 1990년대 평단과 문인들마저 사로잡은 김용만 소설가. 어느 새 일흔 다섯이된 노작가는 여전히 창작 중이었다.

죽는 날까지 글 쓰는 자신을 상상하는 그의 모습은 봄소풍을 기다리는 소년같았다. 가전제품 외판원에서 경찰, 리어카 장사꾼에서 점원 40여 명을 둔 음식점 사장님, 늦깎이 소설가에서 문학박물관 관장.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가난에 20여 개 직업을 전전했던 그다. 파란만장한 삶에 지칠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쉬지 않는 ‘청춘’이었다.

비법을 물었다. “정신적으로 노인이기를 거부해! 자신의 의식을 깨는 파격성을 체질화 시켜야 한다고!”

 ▲ 용산고등학교 시절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생 2명씩 모여 청진회를 조직하고 고문으로 민중운동가 백기와시를 모심 
 ▲ 용산고등학교 시절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생 2명씩 모여 청진회를 조직하고 고문으로 민중운동가 백기와시를 모심 

가난이 발목잡은 청춘, 죽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지리도 가난했다. 태어나기를 그랬다. 50세 넘어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했고 아버지는 하릴없이 절머슴(불목하니ㆍ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으로 일했다. 다행히 학교는 다녔다. 가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여에서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가난해서 더 다닐 수 없는거야. 14살에 부산으로 가출해 부산역에서 만난 식당 아주머니 덕에 고등학교 교사 집에 들어가 부산 중학교를 졸업했어. 독학으로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마쳤지. 이상하게, 그래도 우리나라 일류학교만 다닌거야.”

대학은 가지 못했다. 사립명문 법대에 합격했지만, 장학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전체 수석을 놓쳤다. 그래서 공군에 자원 입대했다.

“이등병때 옆집 아저씨가 혼자 면회와서 ‘너 큰일 났다. 너희 어머니가 치매끼가 있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거야. 머리가 헷까닥 돌았지. 참모총장을 찾아갔어. 제대시켜 달라고. 겁없는 짓이지.”
 

 ▲ 정보과 형사 시절 채증 카메라를 메고있다 
 ▲ 정보과 형사 시절 채증 카메라를 메고있다 

당시 김 소설가가 찾아간 참모총장은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장군이었다. 자원병에게 제대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참모총장 특명으로 상병 제대했다.

‘평생 부모님때문에 지연된 인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제대 후, 부모님을 모시고 연애편지를 대필하며 인연 맺은 군대 친구를 찾아 부산으로 갔다.

“60년대 초, 전축도 안 나올때야. 금성 라디오 외판원 생활을 하는데 그 때 실물을 보여주면서 팔아야하거든. 돈이 있어야지. 카탈로그만 보여주니, 누가 사겠어. 굶어 죽겠는거야. ‘죽어버리자’하고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에 올라갔는데 막상 죽지를 못하는 거야.”

이번에도 부모가 발목을 잡았다. 터덜터덜 막차 버스를 타고 돌아 가는데 라디오 광고가 들렸다. 경찰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경험담을 그의 자전 소설 <능수 엄마>에서 찾을 수 있다.

『합격 체중이 55킬로 이상인데 53킬로 밖에 안 나가는기야. 그래 갖고 판정관 의사가 물을 마시고 오라캐서 양은 대접으로 세 대접을 마시고 달아보니까네 54점 2킬로가 나가는기라. 판정관이 엉덩이를 탁 치며, 한 그릇 더! 캤는기라.

퍼뜩 한 대접을 더 마시고 달아보니까네 저울침이 55킬로에 대롱대롱하는기라. 그란데 5분도 안 돼갖고 야가 졸도했는기야. 오줌보가 터지고 나니까네 제 정신이 들더라캤다.』

그렇게 경찰 신체검사에 합격했다. 1963년, 봄이었다. 밖으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담당하는 정보과 형사, 한 마디로 잘 나가던 경찰이었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쓰고 싶었던 김 씨는 한직으로의 “좌천을 자원”한다. 교도관과 강원도 해안 경비로 근무하며 맘껏 책을 읽었다.
 

 ▲ 신경숙 소설가 부부와 김영하 소설가 부부가 함께 
 ▲ 신경숙 소설가 부부와 김영하 소설가 부부가 함께 

“돈 벌면서 글 쓰는 것이 소원이어서 일부러 한가한데 간거야. 60년대 중반인데 그때에는 해수욕 개념도 없었고 강릉에서 서울까지 14시간 걸려. 바닷가에 (북한 공작원 침투 방지용)철조망도 없던 시절이라고. 정말 맘 놓고 밤이고 낮이고 글 썼던 거지.”

어민 출항을 눈감아준 징계로 강원도 양구로 쫓겨가 “공무원으로 임용된 아내의 신원조회 업무를 다른 직원에게 막걸리값 5백원에 사” 결혼하기까지 황금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고 바빠지자 돈 벌어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이 무너졌고, 결국 경찰 생활 10년 만에 사표를 낸다.

김 소설가는 ‘퇴직금 22만원’을 갖고 부산으로 내려가 자동차 광택 사업을 벌여 돈을 꽤 벌었지만, 화재로 ‘그지’가 됐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도 있을까 싶다.

이어지는 그의 인생살이는 더 굴곡지다. 서울로 올라가 10년 동안 공사장 인부, 배추 장사,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렸다. 배추 한 접 살 돈이 없어 열 포기씩 받아 팔 정도로 가난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 다녔다. 테이블 4개 뿐인 보쌈ㆍ막국수 전문집 ‘춘천옥’을 차리면서, 드디어 가난이 물러났다.

“서울에서 청계천 한 군데 말고는 보쌈집이 구로공단 오거리에 우리 집 밖에 없었는데, 난리도 아니었어. 롯데에서 놀이시설 오픈하는데 체인점 내라 하고, 외국에서도 연락 오고. 정치인, 인기 배우할 것 없이 매일 버스 2대가 올 정도였지.”

1980년대 점원 40명이 일하는 대박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으로 억대 부자가 됐다. 단 하루도 못 쉰 대가는 달콤했다.

지천명(知天命)에 한 발 디딘 꿈의 길
“지금은 ‘편의주의시대’야. 모든게 편리하지. 대학생들 가르칠 때 졸업 후 꿈을 물어보면 100%가 취직이야. 물론 취직 중요하지. 그런데 말야.

우리 세대는 아무리 배고픈 시대여도, 정말 꿈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여도. 꿈은 컸거든. 돈에 욕심 부리지 말고 성취를 크게 가져야 해. 욕심이 아니라 성취!”

김 작가의 가치관은 요식업계 신화를 기록한 직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양평군으로 내려간 대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오로지 글쓰기에 매달리기 위해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 일을 저질렀다.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매일 밤 일기를 쓰며 자신을 달랬던, 신앙같은 문학을 외면할 수 없었던 탓이다.
 

 ▲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박완서 소설가 이경철 시인과 집에서 
 ▲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박완서 소설가 이경철 시인과 집에서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 오직 글이야. 팔자지. 어렸을 때부터였어. 모든 원인이 가난때문이었잖어. 돈 벌겠다고 이를 갈아붙였야하는데…. 그랬다면 춘천옥을 못접었겠지. (내겐)문학이 신앙이었던거야.”

지난한 삶은 예정된 것처럼 그의 소설에 귀한 재료가 됐다. 마흔 아홉 살에 1989년 ‘현대문학’에 단편 <은장도>로 등단, 이듬해 ‘한길문학’에 발표한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로 평단과 문인 사이에서 화제의 늦깎이 소설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말씀하시길>은 한 걸인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구걸 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독특한 문체에 이데올로기 폭력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상징성 뛰어난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53세가 되어서야 첫 소설집 <뉜 내 각시더(실천문학사 刊)>를 출간, 인터뷰 요청과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다.

등단 후에야 문학 공부도 시작했다. 전문대, 4년제, 대학원까지 문예창작과 국문학과를 전공했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소설가로 탄탄대로를 꿈꿨으나, 예상치 못한 시련을 맞기도 했다.

“대학에 다닌 게 문제였어.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내 의식과 정서가 흔들린 거지. 얻은 것은 학력이요 잃은 것은 문체였다고. 더욱이 인터넷 시대에….”

김 작가는 초심을 다잡았다. 장편 <인간의 시간(문이당 刊)>, <칼날과 햇살(중앙M&B)>, <아내가 칼을 들었다(랜덤하우스)> 등 젊은 시절 한을 풀어내듯 작품을 펴냈다.

사회에 대한 냉철한 작가적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이끌어냈고, 이 중 춘천옥 성공 스토리를 쓴 소설 <능수엄마>는 KBS 라디오 일일연속극으로 방송돼 대중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경기대학교와 서울문화예술대학 등 강단에도 섰고 경희문학상, 국제펜문학상, 만우문학상, 불교문학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도 갖췄다. 이제 진짜 쉴 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지난 2010년 6월 사재를 털어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잔아문학박물관’을 연다.

소설가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 친필원고를 비롯해 한국문학계 중요 자료를 전시한다. 자신의 저서 <세계문학관 기행>에 수록된 세계 90여 개국에서 수집한 자료도 있다.

아내 여순희씨가 국내외 유명한 작가의 얼굴을 흙으로 빚은 테라코타 작품도 볼거리다. 귀한 문학 자료가 전시되는 이 박물관은 마치 노작가의 창작 의지를 복돋우는 ‘신전’같다.

그는 이 신전에 마련한 작은 서재에서 책에 파묻혀, 또 글을 쓴다. 최근 비평가로 인정받아 해외에 국내 작가 작품을 소개하는 청탁 원고도 마감해야 하고, 연재 중인 소설도 있다.

“어느 분야든 창조하겠다는 의욕을 갖고 육신을 너무 조심스럽게 대접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또 서재로 향했다. “70대지만 20~30대의 의식을 지니려고 애쓴다”는 노작가가 펜을 잡고 있는 모습이 선하다.

 

                기사 내용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93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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